REVIEW
여름날의 깊이
함연선
이 영화의 배경이 겨울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겨울은 보다 고요한 계절이고 여름은 보다 소란스런 계절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말소리는 여름날의 소리—풀벌레, 선풍기, 해변가의 소리 등—와 섞여 뭉개지거나 혹은 동시에 터져나와 소음이 되어버린다. 귀기울여보지만 관객으로선 알 수 없는 의미가 인물들 사이에서 교환된다. 어느 장면에선 두 인물이 들리지 않게 귓속말을 하고 저들끼리 웃음을 터뜨린다. <여름날>에는 총 일곱 개의 여름날이 등장한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나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똑같은 것처럼, 주인공 승희의 7일도 반복을 전제로 한다. 승희는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어머니의 짐이 창고처럼 쌓여있는 컨테이너에서 잠을 자고, 해가 뜨면 거제를 돌아다닌다. 반복된 하루 하루가 모이는 동시에 하루와 하루 사이의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서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말이 아니라 몸짓에서 발생한다. 말은 중요하지 않기보다는 다른 것들과 똑같이 중요하다. 배우들의 대사는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카메라가 워낙 멀리서 인물들을 바라보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말 많은 소리들이 섞이고 틈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 짖는 소리, 멀리 도로에서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 심지어는 (아마도)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줄 모르거나 그 사실을 딱히 신경쓰지 않는 주변 행인들의 전화 통화까지 인물들의 말소리와 비슷한 수준의 음량을 지닌다.
승희에게는—따라서 이 영화에서는—말은 소리일 뿐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지위를 특별히 갖지 않는다. 승희가 유독 조용한 것도, 그 누구와의 대화도 주도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말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색함을 물리치기 위해 습관적으로 뱉는 “어…” 같은 소리나, 혹은 너무 멀리서 들려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대화에서 포착 가능한 경상도 방언의 음조 같은 것이다. 혹은 대화 도중에 엄습하는 어색하고도 무서운 정적이거나. 해변에서 만난 남자들이 시끄럽고 수다스럽게 말하는 것과 달리, 승희가 낚시를 하다 만난 남자는 어색하고 조용하게 입을 뗀다. 그와 승희가 나누는 대화의 자연스러움은 일반적인 영화에서 통용되는 그럴듯한 연기의 그것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TV 다큐멘터리의 대화 장면에서 곧잘 감각할 수 있는 '어색한 자연스러움'에 가까운 것이다.
승희가 거제에 “내려온” 것도 대화 사이의 정적이나 말을 시작할 때 튀어나오는 의미없는 습관에 가까운 행위다. 휴직계를 내고 거제에 왔다지만 우리는 그녀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 단지 거제에 그녀의 오랜 친구가 있고, 그녀의 할머니와 삼촌이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아마 거제는 그녀의 고향이거나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살았던 동네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는 친구의 질문에 승희는 아니라고 답하지만 더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거제에 온 이유를 그녀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다. 이 ‘내려옴’의 성격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휴가도 아니고, (배급사의 홍보문구와는 달리) ‘유배’도 아니다. 이는 그 무엇도 아닌 어떤 시간일 뿐이다. 단지 그것이 뭔가가 아닌 어떤 것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때 우린 그에 맞는 언어를 찾고자 헤맨다. 그래서인지 승희는 계속 돌아다닌다. 디제시스 세계를 돌아다닐 뿐 아니라 화면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안에서 밖으로 나간다. 쇼트의 길이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정해진다.
따져보면 승희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꾸 승희에게 왜 거제에 내려왔냐고, 언제 서울로 올라가느냐고 묻는다. 내려오고 올라가기. 물론 거제는 위도 상 서울보다 남쪽에 있고, 서울은 거제보다 북쪽에 있지만, 오르고 내린다는 말은 언제나 이상하게 들린다. 승희에게 거제는 집도, 고향도, 혹은 ‘본가’가 있는 곳도 더이상 아니다. 승희의 어머니는 (아직도 그녀의 짐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할머니가 계시지만 삼촌은 그녀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골골”하다고 말한다. 삼촌과 그의 애인은 승희가 서울로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다. 왜일까.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그의 명의로 되어 있지 않을까봐? 공시지가를 알아본 땅에 대해서 승희가 무어라 할까봐?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한다기에는 삼촌은 너무 차분해 보인다. 그런 종류의 걱정들이 불러일으키는 초조함과 불안을 그에게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외려 언제나 “승희야”라고 (운을 떼어서 승희의 이름을 관객으로 하여금 외우게끔) 하는 삼촌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고 부드럽다. 말하자면 그의 목소리는 영화 속 그 어떤 인물의 목소리보다도 명료한 발음과 명료한 의미를 동반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승희를 둔중하게 가격한다. 승희의 세계를 불쾌하게 침범한다. 결국 승희를 거제로부터 몰아낸다. (승희는 서울에 올라갈 것이다. 이는 부조금 일부를 전해주며 “서울에 올라가서 생활비로 보태써라”고 말하는 삼촌의 목소리로 명확해진다.)
영화가 승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건 분명하다. 그가 주인공이니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겐 고유의 이름이 없고 모두 승희와의 관계로 설명된다. 승희의 친구, 승희의 할머니, 승희의 삼촌과 그의 애인 등등. 그 중에서도 제일 돋보이는 건 승희가 난생 처음 낚시를 하러 가서 만나게 된 그 남자다. 그는 승희 또래처럼 보이고, 조선소에서 일하며, 거제도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승희와 그는 어색하지만 점차 호감을 쌓아나간다. 그리고 승희는 서울로 올라가는 대신, 그와 함께 폐왕성에 오른다.
영화는 화면의 깊이감을 통해 승희의 고립과 외로움을 드러낸다. 정말 대부분의 쇼트가 화면의 깊이감에 천착한다. 할머니도, 삼촌도, 삼촌의 애인도 승희와 같은 깊이에 있지 않다. 승희가 전경에 있으면 그들은 후경의 문 뒤에 있고, 승희가 후경에 있으면 그들은 전경에 서서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승희와 함께 화면의 깊이를 샅샅이 걷는 것은 앞서 언급한 그 남자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폐왕성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폐왕성 장면은 총 세 개의 쇼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선 폐왕성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패닝 쇼트가 있다. 깊이감의 강조라는 맥락 하에서 움직이는 <여름날>의 카메라는 절대 평면적인 이미지를 위해 패닝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후경 가장자리에서 전경 중앙으로 사선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을 좇는다. 그리고 그들이 전체 동선의 중간쯤 왔을 때 잠시 멈추었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사선의 깊이를 따라 전경에서 후경으로 움직이는 인물을 좇는다. 그 다음 쇼트는 두 인물이 폐왕성 꼭대기에 설치된 철문을 지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카메라를 등지고 전경으로부터 철문이 설치되어 있는 중경으로 걸어간다. 남자가 철문의 잠금쇠를 힘겹게 풀고 문을 열고 나면, 두 사람은 그 너머인 후경으로 걸어가면서 점점이 사라진다. 폐왕성 장면의 마지막 쇼트도 첫 번째 쇼트에서와 비슷한 구성의 패닝을 한다. 화면 오른쪽에서 나온 인물들은 아슬아슬하게 쌓인 성곽이 배치된 왼쪽으로 걸어가는데, 역시 미묘하게 사선으로 더 들어간다. 얼마 후 그들은 카메라를 등지고 성곽에 걸터앉는다. 그들의 등은 작아 보이고, 승희에겐 고향이었던 곳이자 남자에겐 거처인 곳은 더 작아 보인다.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그들과 거제의 거리는 아득해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희는 새벽에 홀로 폐왕성에 오른다. 일전에 앉았던 터에 다시금 앉는다.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승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남겨진 엄마의 옷 뿐이다. 거제에 온 첫 날, 승희는 엄마의 파란색 목티를 입고 잔다. 여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