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콘크리트의 불안>(장윤미, 2017)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은 "곧 붕괴될 것 같은 콘크리트 건물을 보며 흔들리는 젖니를 악물던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1969년 서울 성북구 정릉에 세워져 2017년 1월 철거가 완료된 스카이아파트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어떤 아파트와 관련된 한 편의 에세이를 들려주는 <콘크리트의 불안>은 인디다큐페스티발, DMZ국제다큐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다. 감독의 동의를 얻어 영상 전편을 소개한다. 더불어 『오큘로』 편집동인인 이도훈 평론가가 쓴 장윤미 감독론을 함께 올렸다.
________________critic's essay_________________
"끊임없이 이동하고 탐구하는 카메라" _ 이도훈 영화평론가
전통적인 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카메라가 매개하는 현실의 특정 사건이나 대상과의 마주침, 즉 전영화적(profilmic) 현실의 촬영을 기본으로 한다. 비록 디지털 시대의 개막으로 촬영을 다큐멘터리 제작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러한 영화적 실천은 여전히 카메라의 기계적 시선을 통해 현실이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더불어 현실과 거리를 두는 정도에 따라서 카메라는 권위적인 설명자, 중립적인 관찰자, 능동적인 참여자, 사회적 배우 등의 시선과 조응하고 이는 각기 다른 다큐멘터리의 양식을 낳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카메라의 시선은 다큐멘터리의 목소리 그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카메라의 시선이 다큐멘터리의 양식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고 본다면, 최근 장윤미의 작업은 이를 입증하는 사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단편인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2014), <늙은 연꽃>(2016), <콘크리트의 불안>(2017), 그리고 근작인 <공사의 희로애락>(2018)을 거치면서 여행하는 자와 탐구하는 자로 대표되는 두 개의 명확한 시선을 자신의 영화적 양식으로 확립했다. 특히 여행하는 자의 시선이 강조된 그녀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하나의 대상은 항시 두 개의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녀의 작품에서 어머니는 부엌과 방, 할머니는 자신의 집의 내부와 외부. 그리고 아버지는 여러 일터 사이를 오간다. 연출자인 장윤미 또한 작품의 주요 대상을 만나거나 특정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어딘가를 다녀오기를 반복한다. 대상과 연출자의 이러한 이동은 현실을 경험적으로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객관과 주관,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묘한 긴장이 발생한다. 이처럼 장윤미는 자신의 영화 제작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고수하면서 전영화적인 현실과 영화적인 현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 그것은 카메라로 바라보기 이전의 세계와 카메라로 바라본 이후의 세계가 표면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전혀 다르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여행과 탐구: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와 <늙은 연꽃>
장윤미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두 번째 연출작인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가 국내 영화제들을 통해 공개되면서부터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그것을 띄어 읽는 방식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방을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가방을 강조한다. 전자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한 억압을 받으면서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가리키며. 후자의 경우 만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어머니의 변화된 삶을 암시한다. 장윤미는 하나의 대상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된 면모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짓는 방식을 선호해왔다. 그녀의 <늙은 연꽃>, <콘크리트의 불안>, <공사의 희로애락>은 각각 삶과 죽음, 단단함과 부드러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기쁨과 슬픔 등을 떠올리게 한다. 장윤미는 하나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뒤집어서 바라보는 것을 선호한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는 자전적 다큐멘터리로 분류할 수 있다. 서울에 사는 딸이 고향인 대구를 수차례 방문하는 동안 자신의 어머니를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영화는 그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영화 만들기에 갓 입문한 사람의 서투른 손길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연출자와 그 주변의 삶을 작품의 전면에 배치하면서 연출자가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자기 기입(self-inscription)의 방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직 뚜렷한 탐구 주제를 찾지 못해 일상적인 소재를 대상화하기에 급급할 뿐 그것을 담아낼 자기 고유의 형식을 창안하는 데는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입문자의 서투른 습작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위에서 지적한 단점들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영화 만들기 그 자체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는 일부 장면들에 의해서 상쇄된다. 카메라를 잡은 감독의 손과 연필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서로 차이가 아니라 닮음의 관계를 맺는 순간들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방에 문제집, 노트, 필기구 등을 가득 넣어 다니면서 늦은 나이임에도 열정적으로 공부한다. 장윤미 자신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뒤늦게 카메라를 들었다. 서툴게 연필을 잡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어머니의 손과 서툴게 자기 주변의 삶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감독의 손은 서로 친족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설정 덕분에, 이 영화는 단순히 장윤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독 본인의 것을 포함한 삶 일반을 성찰하는 영화로 도약한다.
영화 후반부, 어머니의 손이 감독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잡는 장면이 있다. 어머니는 딸의 가르침을 받아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밤하늘에 휘영청 밝게 떠 있는 달을 클로즈 업 한다. 그 쇼트는 다소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묘한 울림을 준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어머니의 삶과 딸의 삶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좀처럼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뒤늦게 공부를 하는 어머니를 이해 못 하는 딸과 영화라는 모진 길을 택한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밤하늘의 달을 찍은 그 장면은 서로 이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평행하는 두 세계가 한 지점에서 겹쳐지면서, 영화가 보여주지도 또 말해주지도 않는 부분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변증법적인 순간으로 볼 수 있다.
<늙은 연꽃>
<늙은 연꽃>은 1박 2일 동안 연출자가 자신의 할머니 댁을 방문해서 찍은 것으로, 치매에 걸려 점차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할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품이다. 영화는 관찰자적 시선을 극대화하고 연출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의 기법으로 근거리에서 할머니의 일상을 관찰한다. 전작이 연출자의 자기 기입을 강조한다면 이 작품은 연출자의 자기 소거(self-effacement)를 지향한다. 연출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자막, 내레이션, 간자막, 음향 효과 등을 최소화 하는 가운데 할머니가 자신의 집 안팎에서 소일거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자칫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연출 방식의 단점은 기록에 대한 열망을 넘어서는 표현에 대한 열망을 통해 상쇄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작품이 할머니의 삶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할머니의 삶을 보여주는 데 더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보여주기는 할머니의 삶의 시간들과 관련이 있다. 장윤미의 카메라는 할머니의 신체,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가재도구나 세간살이, 그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의 건축적 요소들을 느릿하고 집요한 시선으로 기록한다. 그 늙거나 낡은 대상들의 물질적 표면은 기나긴 시간의 흐름이 공간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영화는 할머니의 늙음, 할머니의 기억상실,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을 시각화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찰과 기록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기록의 과정은 점차 죽음의 그림자, 즉 삶의 유한성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서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아서 잡초를 뜯는 장면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계절적으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마치 그 일이 자신의 습관인 것처럼 묵묵히 무덤 주변을 살핀다. 그러한 행동은 남겨진 자가 떠난 자의 자리를 돌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남겨진 자가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자리를 살피는 자세로도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장례 풍습에 비추어 생각해봤을 때, 영화 속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자리는 먼 훗날 할머니가 함께 묻힐 가족묘로 볼 수도 있다. 즉, 할아버지의 무덤은 할머니가 사후에 머무를 장소인 것이다. 실제로 장윤미는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찍은 <공사의 희로애락>에서 할아버지의 무덤 곁에 할머니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봤을 때, 이 영화는 단순히 신체적으로 노쇠한 한 인간의 삶을 표면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 속에서 감지되는 인간의 유한한 삶에 대한 이해를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죽음에 대한 암시가 있다고 해서 이 영화의 분위기 전체가 어둡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감독은 카메라 뒤편에서 할머니를 향해 다음 명절에 보자는 약속을 건넨다. 작품 전체의 일관성을 깨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삶과 죽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끊는 기능을 한다. 연출자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영화 내내 스크린을 홀로 채우고 있던 할머니의 고독한 시간이 일단락되는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은 기능적으로 할머니라는 한 사회적 인물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할머니의 늙음, 기억상실, 죽음을 표면적으로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시공간적 질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윤미는 특정 대상에 대한 고정적인 이해와 판단을 최대한 유보하는 대신 그 대상을 향한 개방적인 시선을 통해 삶 너머의 또 다른 삶을 그려보려 한다.
평행하는 두 세계: <콘크리트의 불안>과 <공사의 희로애락>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주제에 대한 접근은 <콘크리트의 불안>에서도 계속된다.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귀에 들리는 세계를 수평적으로 나란히 배열한 작품으로 여기서 아파트는 구체적으로 특정 건축물을 지시하는 동시에 추상적으로 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시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1969년 서울 성북구 정릉에 세워져 2017년 1월 철거가 완료된 스카이아파트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어떤 아파트와 관련된 한 편의 에세이를 들려준다. 이러한 구성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횡단하고, 일인칭 주관성을 드러내고, 발화된 텍스트성을 활용하고, 공적인 영역에 대한 개입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에세이영화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앙드레 바쟁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몽타주, 즉 수평적 몽타주(horizontal montage)를 통해 아파트에 대한 연출자의 주관적 경험과 그것에 기초한 지성을 드러내고 있다.
<콘크리트의 불안>
영화는 생과 사가 순환하는 인간의 유기체적인 삶을 도시의 삶에 빗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 오프닝은 스카이아파트 일대의 광경을 패닝으로 보여주면서, 그 장면 위로 “근육 없는 물컹한 아기의 몸에서 처음 난 딱딱한 그 무엇. 잘 감추어 두었는데 난데없이 툭 삐져나온 뼈처럼 낯설기도 하고, 뿌린 씨가 자라 맺은 열매처럼 신비롭기도 하다”는 내레이션을 덧입힌다. 비유적으로 말해지는 ‘아기의 몸에서 처음 난 딱딱한 그 무엇’은 문자 그대로 치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지평선 위로 불쑥 솟아 있는 아파트를 비유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과 아파트의 삶은 물질적으로 소멸하는 생애 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물론 그 생의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감독은 아파트에 얽힌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속에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아파트를 욕망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와 그 가족의 일원으로 아파트에서 유년기 대부분을 보냈던 일인칭 화자의 추억이 뒤엉켜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스카이아파트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 또 그 이야기들이 실제 감독의 자전적 경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에세이적 사유는 스카이아파트라는 특정 건축물을 소재 삼아 아파트에 얽힌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 아파트에 대한 욕망을 추동하는 도시적 질서에 관한 사유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아파트를 매개로 아파트에 관한 실제적, 주관적, 가상적 이야기를 자유롭게 늘어놓는다. 에세이스트는 “결합자, 특정 대상을 둘러싼 배열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자”라고 했던 막스 벤제의 정의를 따르자면, 장윤미의 <콘크리트의 불안>은 아파트를 둘러싼 끊임없는 배열 속에서 동시대의 도시적 문제에 대한 연출자의 확장된 사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인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영화의 시각적인 세계와 청각적인 세계가 완벽하게 평행하는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스카이아파트에 관한 영상과 영화가 들려주는 아파트에 관한 한 편의 에세이는 전혀 다른 시공간을 배경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2017년까지 실존했던 스카이아파트를 중립적인 시선에서 관찰하고 있지만, 후자의 에세이는 정확한 시공간적 배경을 알 수 없는 한 가족의 아파트에 얽힌 이야기를 일인칭의 시점으로 다루고 있다. 그 두 세계는 질적으로 다르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시공간 안에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는 어떻게 단일한 시공간 안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공현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장윤미는 흡사 영상 위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 결과 영화의 공간이 글쓰기의 공간을 매개한다. 또한, 그 글쓰기의 공간은 도시의 공간을 모방한다. 실제 현실의 오래된 도시가 그 자신의 과거를 다양한 물질적 흔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오래된 양피지와 유사하다고 본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도시의 질서를 모방하여 어느 구체적 아파트에 관한 영상 위에 어느 추상적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콘크리트의 불안>은 영화의 공간, 글쓰기의 공간, 그리고 도시의 공간을 계속해서 매개해나가면서, 현실에 있을 법하면서도 픽션에나 존재할 것 같은 어느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공사의 희로애락>
장윤미는 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을 자신의 영화적 방법론으로 사용하면서 특정 대상에 대한 사유를 끌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녀의 최근작인 <공사의 희로애락>에서도 계속된다. 이 작품은 건설노동자로 한평생을 살아온 온 감독의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감독은 건물을 만드는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했으며, 그러한 계획은 자연스럽게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삶과 건설 노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김미례의 <노가다>(2005)와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김미례가 탐사 보도 기자의 태도로 건설업을 구조적인 관점에서 해부했던 것과 달리 장윤미는 인터뷰와 퍼포먼스를 결합해 건설 노동에 대한 다양한 기억, 정념, 감각 등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을 따른다. 구성적으로 <공사의 희로애락>은 세 층위의 영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그가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삶을 구술하는 장면, 감독 본인이 과거 아버지가 일했던 노동 현장으로 여행하는 장면, 그리고 감독과 그녀의 아버지가 함께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장면들이 비선형적으로 편집되었다. 더 단순화하자면, 카메라 앞에 선 감독의 아버지가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는 동안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연출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에 일했던 장소를 방문해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시각화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철근 구조물로 가득한 어느 공장의 내부가 보인다. 정확히 그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규모로 보아 여러 철근을 조립해 거대한 건축물의 뼈대를 만드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공장의 노동자들 대부분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체득한 숙달된 몸짓으로 일하고 있다. 철근과 철근이 부딪치면서 내는 둔중한 소리, 절단기가 철근과 마주치면서 내는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용접기의 불꽃이 내는 단속적인 파열음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장 밖으로 나서고, 바로 그 순간 감독의 아버지가 카메라를 향해 걸어오면서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상기된 표정은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사회적 배우로서의 몸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찍고 있는 딸을 향한 의례적인 몸짓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 영화는 한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서 취하게 되는 다양한 몸짓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몸짓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와 의사소통하기 위한 일상적인 몸짓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공장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된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다소 경직된 자세로 인터뷰에 응하는 감독의 아버지는 예상과 달리 자신의 일생을 극적으로 서사화한다. 유년기에 몸이 아파 단 하루 결석했던 탓에 개근상을 받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면서, 아버지는 자신의 삶에서 성실한 태도가 가장 중요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과거 열악한 근로 조건 속에서도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특히 자신이 참여한 현장의 건축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근대 산업화의 주역으로 그린다. 이는 발화자가 자기 자신을 한국 근현대사의 영웅주의적인 남성 서사에 편입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정신구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던 월터 J. 옹에 따르면, 목소리에 의존하는 구술문화에서 기억의 대상은 주로 무겁고,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이며,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관용적이고, 상투적이고, 정형적인 어구를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공사의 희로애락>은 특정 인물의 목소리에 의존하면서도 그의 삶이 영웅적인 서사에 갇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살아왔던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다양한 감각을 통해서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감독은 아버지의 삶에서의 노동이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어떤 기억과 감정의 결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일하면서 가장 많이 기뻤던 순간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하면서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순간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발화된 텍스트와 감독이 여행 중에 찍은 영상, 즉 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를 나란히 보여준다. 아버지의 발화된 텍스트와 감독이 시각적으로 포착한 이미지들은 처음엔 서로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각적인 이미지가 발화된 텍스트를 환기하는 것처럼 변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현재 일하고 있는 구미와 그가 과거에 일했던 거제, 광주 등을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영화에 담았다. 대부분 버스로 이동한 그 여행에서 감독은 차량 내부의 풍경이나 그 외부의 풍경을 찍었고, 그 각각의 영상들은 아버지와의 인터뷰 장면들과 비선형적으로 배열되었다. 이 영화에서 시각적인 이미지, 즉 감독이 여행 과정에서 기록한 풍경 이미지는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으로 나뉜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 스쳐 지나가는 여러 장소들은 아버지의 과거를 찾아 나서는 거대한 시간 여행의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은 것이다. 한편, 영화는 그러한 스펙터클한 풍경들 중간에 버스의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수의 손을 클로즈업 한다. 그 운전수의 손은 무언가를 조작하면서도 기존에 없던 행위, 운동, 형상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철근을 다루는 아버지의 손과 닮았다. 이처럼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아버지의 과거와 그의 현재를 불러들인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풍경 이미지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시각적인 이미지이면서도 영화의 주요 대상인 감독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봤을 때, <공사의 희로애락>에서 시각적인 이미지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순간을 기록한 결과물이 아니라 바로 그 시공간 속에 다양하게 얽혀 있던 경험, 기억, 정념 등이 카메라의 시선을 매개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감독의 아버지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그는 과거 광주의 한 공사 현장에서 일할 때 대구와 광주를 총 168번이나 왕복했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의 도움 없이 홀로 운전을 했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누적된 피로로 늘 눈꺼풀이 천근만근인 상태였기 때문에 그 운전은 곧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과 같았다고 토로한다. 화면이 바뀌면 감독 자신이 버스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는 장면들이 보인다. 버스는 심야에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 어두운 풍경은 고속도로 위에서 생사를 내걸었던 아버지의 기억을 감각적으로 시각화한다. 이 외에도 아버지의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동료들과의 소원한 관계와 앞으로의 자기 삶의 불투명한 전망을 드러낼 때 카메라는 서울의 어느 재개발 공사 현장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기 위해 과거의 것을 부수었을 것이 분명한 그 공사 현장은 수많은 건축 자재를 만들어내고도 이제는 자신의 쓸모없음에 대해서 걱정하는 아버지의 삶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세상은 파괴를 통해서 무언가를 창조하지만 인간은 창조를 통해서 삶을 소진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장윤미는 삶의 아이러니를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스트이다. 그의 시선은 탐구하는 자의 것이자 여행하는 자의 것이다. 그녀의 한쪽 눈이 정적이고 영원한 것을 본다면 다른 쪽 눈은 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을 본다. 그리하여 그녀의 영화 속에서 모든 대상은 생과 사를 거듭하며, 모든 경험은 일시적이면서도 영구적이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이야기는 반복과 차이를 통해 재구성된다. 흡사 장윤미의 영화는 도돌이표가 붙어 있는 악보처럼 자신의 렌즈를 통과한 전영화적 현실들을 영화적 현실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때로 그러한 세계는 단조로운 리듬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 순간이 고유하고 고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