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스와 패터슨, 일상의 아마추어들

CRITIQUE

메카스와 패터슨, 일상의 아마추어들
: 요나스 메카스의 필름/비디오 다이어리와 짐 자무쉬의 <패터슨>에 대한 낯선 비교

장승연


“그 순간 모든 것이 나에게 왔다. 산산이 조각난 채.”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본다’는 그 특별한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읊조린 이 문장을 잠시 빌리는 것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지난겨울, 메카스의 한국 첫 전시 『찰나, 힐긋, 돌아보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7.11.8~2018.3.4)에 맞춰 상영된 그의 영화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As I Was Moving Ahead Occasionally I Saw Brief Glimpses of Beauty>(2000)는 말 그대로 “산산이 조각난 채” 관객에게 다가온다. 장장 29년(1970~99)에 걸쳐 촬영한 16mm 필름을 288분의 긴 러닝타임으로 편집한 이 영화는 12개의 챕터 구성이 무색하리만치 일상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스쳐지나가듯 이어진다. 카메라로 ‘채집’된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동안 불쑥 등장하는 작가의 독백이나 자막, 텍스트, 사운드가 그 파편적 경험을 더욱 부추긴다. 

메카스는 이러한 영화적 서술 혹은 편집 방식에 대하여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는 관객을 자상하게 배려하려는 듯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독백을 들려준다. 그의 삶, 그리고 예술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나는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내 인생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내 삶의 조각이 진정으로 속한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내용과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담은 것을 필름으로 편집할 때 원래는 시간순으로 나열할 생각이었다가,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우연에 기대어 필름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마치 선반에 손이 닿는 대로 물건을 꺼내듯이 말이죠. 그냥 내버려뒀어요. 흘러가도록. 순수한 무질서 속에 어떤 질서가 있을 거예요.” 


"산산히 조각난", 그래서 아름다운 영화


명망 있는 영화감독의 29년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니 꽤 거창한 영화사적 사건들이 펼쳐질까 싶지만, 그러한 기대를 보기 좋게 비껴가는 것이 바로 메카스의 영화다.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와 <월든: 일기, 노트, 스케치 Walden: Diaries, Notes and Sketches>(1969) 등의 대표작을 비롯해 각 영화의 편집과정에서 누락된 필름으로 제작한 <행복한 삶의 기록에서 삭제된 부분 Out-Takes from the Life of a Happy Man>(2012) 등에 이르기까지, 메카스의 영화들은 ‘필름 다이어리’라고 불린다. 사건이라 부를만한 별다른 거창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매일 매일의 평범한 삶의 기록이 영화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가족과 함께 잔디가 파릇한 센트럴파크로 소풍을 가고, 와인 한 잔과 친구들과의 담소만으로도 충분히 풍성한 식사를 나누며, 창문으로 햇빛이 비치는 한가로운 대낮에 쪽잠을 청하고,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는 풍경을 지긋이 담는다. 물론 감독에게만큼은 특별한 순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사건’들도 등장한다. 메카스와 그의 부인 홀리스가 결혼식을 올리고, 딸 우나가 세례식을 받고 아들 세바스찬이 태어나지만, 이 장면들 역시 시간의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불현듯 등장할 뿐이다. 거장 메카스가 아닌 개인 메카스의 사사로운 일상들이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영화는 한없이 미시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삶 자체를 골똘히 응시한다.



<월든: 일기, 노트, 스케치 Walden: Diaries, Notes and Sketches>(1969)


영화 초반에 미리 영화의 서술 방식을 언급한 메카스처럼 나 역시 미리 고백하자면, 이 글은 그가 1960년대 이후 영화계는 물론 뉴욕 예술계에 끼친 영향은 물론 기존 영화의 전형성을 깨기 위하여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던 선구적인 순간들을 언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선형적인 서사의 틀을 깨트리며 파편들의 덩어리를 이루게 한 편집 방식, 필름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폭발시키는 촬영 기법[1] 대한 기술적 분석도 지금 이 글의 몫은 아닌 듯하다. 그보단 삶과 일상에 대한 폭풍 같은 그리움을 촉발시키는 메카스의 ‘필름 다이어리’, 그리고 뒤이어 언급할 영화 <패터슨>(2016)을 나란히 놓고 ‘일상 속의 예술’에 대한 서투른 예찬을 펼쳐보려고 한다.

다시 메카스의 말로 돌아가 보자. 그는 자신의 영화를 두고 “‘영화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는 순간들을, 그 순간의 신성함을, 거의 인류학자처럼 기록했다”[2]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인류학자’라는 표현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가 영화에 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사적인 일상을 찍은 장면들이지만 그것이 그 시대와 공간을 사는 누구나, 혹은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관람객들까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근간으로 둔다는 것을 그는 일찍이 알아차렸거나 혹은 의도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이라면 으레 공유하게 되는 문화적 사회적 틀로서 보편성을 담보한 ‘일상’이라는 것이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그것의 순간들을 아무런 감흥 없이 흘려보내곤 한다. 하지만 메카스는 일찍이 그것의 의미, 소중함을 알아차렸던 게 분명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한 다른 작가도 있다. 자신의 삶과 긴밀히 연결된 글을 썼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일상이 가장 어렵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곤 종종 그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틈틈이, 불현듯, 몹시 황홀하다는 것 또한 절실히 느낀다. 마찬가지로 메카스는 영화 중간중간에 갑작스런 독백으로 일상을 예찬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센트럴파크 소풍 장면 중 어디선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센트럴파크 소풍을 가면 풀밭에 앉는다. 치즈와 와인, 여기에 이탈리아 소시지까지 곁들인다면….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황홀한지….” 그 행복한 순간들을 연대기 순으로 편집하지 않고 마치 순간 반짝이고 사라지는 섬광처럼 파편화시킨 결과, 모든 장면들은 한 개인의 역사로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시적인 발화를 통해 관객들 각자의 일상적 삶과 그 잔상, 기억을 돌려주는 것. “산산이 조각난” 한 타인의 삶의 기록을 본다는 경험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미지로 쓰는 시, 영화로 쓰는 일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요나스 메카스는 매우 행복해 보인다. 그는 매일 매일의 순간마다 습관적으로 삶의 순간들을 담으려는 듯 카메라를 들었을 것이다. 카메라의 눈이 즉흥적이고 즉각적이며 물리적으로 순간을 응시하는 내내 메카스는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고 그렇게 삶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약 50년 전, 매일 일기를 쓰듯 16mm 카메라를 들었던 그의 습관은 아흔을 넘긴 2000년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는 2007년부터 홈페이지에 생활 속의 순간들을 촬영한 ‘비디오 다이어리’를 주기적으로 올리고 있다. 이 작업은 16mm 비디오에서 온라인 디지털 매체로, 영화/예술에서 홈페이지/소셜 미디어로 이어지는 매체의 변화 및 확장과 시대적 흐름에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여전히 매일매일 일기를 쓰듯 무언가를 촬영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그의 한결같음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예술 방식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삶과 예술이 동일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카스에 대한 숱한 비평 글들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기록하는 것에 익숙했으며, 여러 권의 시집을 발표한 시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시집 『세메니스키아이의 전원시 Idylls of Semeniskiai』에 실린 「여름밤의 금빛 향기 The Golden Smell of Summer Nights」의 시작 부분을 가져와본다.

The hands still of honey and clover,  
and on the clothes-leaves of grass and the cool of evening.
How quiet it becomes… How the mist is rising…

리투아니아 출신인 메카스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세메니스키아이의 고요한 여름밤 정경을 시로 적어서 소박한 단어의 나열로 예찬하듯이, 그의 필름 및 비디오 다이어리 역시 소박한 일상 이미지들을 나열한다. 단어인지 혹은 이미지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 시든 영화든 그의 예술은 늘 삶의 순간, 장면, 풍경을 포착하고 나열한다. 그의 영화를 향한 많은 수식어들이 대부분 “영화적 시”, “시적 효과”, “시적 명상” 등 ‘시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소환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실험영화”라는 건조한 수식어가 놓치기 충분한 그의 영화 특유의 감수성을 “시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 이처럼 메카스의 예술, 아니 그의 삶에 한 덩어리로 자리하고 있는 시와 영화, 일기의 역할은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중요하다.

메카스의 영화는 매일 카메라로 채집한 일상의 순간들을 성기게 엮은 파편 덩어리다. 그는 그렇게 매일매일 이미지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매일매일 일기를 쓴 한 명의 개인이었다. 그에게 시를 쓰는 것, 비디오를 찍는 것, 일기를 쓰는 것은 같은 결을 가진 행위, 혹은 별도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은 일상적 행위에 가깝다.[3] 영화 중간 즈음에 메카스는 일본 하이쿠 시인 바쇼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은 자막을 보낸다. “시인은 자신을 매일 수련해야 한다.” 그는 그 말 그대로 살았던 듯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이렇게 한 문장을 더 덧붙이고 싶다. “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매일 시를 쓰는 또 한 명의 남자 


일상 속에서 매일 매일 시를 쓰는 또 한 사람이 여기 있다. 미국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그는 흥미롭게도 패터슨이라는 동명의 이름을 가진 버스운전사다. 그의 하루 일과는 거의 비슷하게 돌아간다. 매일 아침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깨어나 시리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 후 버스 운전을 하며 승객들의 시시콜콜한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퇴근 후 아내가 준비한 저녁식사를 마치면 애완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근처 바에 들려 맥주를 한 잔 마신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하루. 이 고정된 삶의 패턴 속에서 그는 틈틈이 시를 쓴다. 아침식사 중에도, 버스 운행을 시작하기 전 운전석에 대기해 앉아있는 몇 분의 시간에도, 도시의 명물 퍼세익 폭포(Passaic falls) 앞에서 보내는 한적한 점심시간에도, 그는 시의 문장들을 떠올리고 노트에 적는다. 때때로 영화는 온전히 그의 시를 위한 노트가 되고 시집이 되려는 듯, 정겨운 손 글씨로 쓴 패터슨의 시를 화면에 자막처럼 적어주거나 낭독을 함께 들려주기도 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영화 속 패터슨의 시는 시인 론 패젯(Ron Padgett)이 썼다.) 패터슨의 시는 그의 일상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집에서 발견한 성냥갑 위에 적혀 있는 ‘오하이오 블루 팁 매치스(Ohio Blue Tip Matches)’라는 글귀는 그의 시의 제목이 되고, 시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We Have Plenty of Matches in Our House.” 이처럼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2016)은 거창함과는 거리를 둔 담백한 영화다. 감독은 패터슨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의 틈과 틈 사이에 시를 심어놓음으로써 반복되는 개인의 일상에 담긴 운율을 끌어내고 삶을 향한 헌사를 바친다.  



<패터슨 Paterson>(2016)


메카스의 전시와 상영회가 한창이던 즈음에 영화 <패터슨>이 개봉한 것은 우연이겠지만, 이 둘을 비슷한 시기에 만나는 경험이란 예상 외의 발견처럼 깊은 인상을 남겼다. 메카스의 작품에 ‘실험영화’라는 수식어가 붙고 자무쉬의 작품에 ‘독립영화’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만 봐도, 이 두 감독은 형식적이고 미학적 측면에서 기존 영화들이 보여준 통념에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한 데 엮인다. 물론 이들은 이미 서로의 예술적 교감은 물론, 심지어 ‘시’를 향한 애정을 서로 나눈 적도 있다.[4] 하지만 지금은 그 ‘시’라는 공통된 교감을 넘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들” 그리고 “매일매일 하는 창작”이라는 공통점으로 이 둘을 한데 엮어보려고 한다. (물론 <패터슨>에서는 사건이라면 사건일 두 가지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메카스의 영화에서 소소한 가족 행사들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이 두 가지 공통점은 곧 예술의 주제 혹은 자세로서의 ‘일상’을 불러내기 위한 수식어이기도 하다. 메카스의 필름 다이어리가 ‘파편’의 나열로서 장면 장면이 마치 오랜 기억처럼 섬광과 같이 흩어진다면, 하루 일과라는 시간의 ‘패턴’에 따라서 거의 유사하게 돌아가는 <페터슨>은 시간에 따라 단순한 구조로 작동되는 영화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예술이 깊숙이 배어있다. 아니, 반대로 그들의 예술에는 일상과 삶이 나란히 그리고 깊숙이 배어 있다.


패터슨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 


또 다른 질문이 하나 생긴다. 시를 발표한 적 없는 (아니, 할 수 없게 된) 패터슨을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그는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공개하는 것에도 누군가의 칭찬에도 매우 소극적이다. 심지어 우연히 만난 소녀가 패터슨에게 시인이냐고 물을 때, 그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던져볼 법하다. 메카스가 2007년 이후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는 비디오 다이어리는 자신의 삶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때론 유튜브에 올려서 익명의 관객들과 즐기는 무수한 대중들의 영상과 어떤 위치에서 비교하고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이룩해놓은 지난 영화사적 업적을 잠시 제쳐둔 채 그저 ‘작품’ 그 자체만 보자면 말이다.) 

메카스와 패터슨이 ‘매일매일 시 쓰기, 일기 쓰기’라는 행위의 주체로서 동등하게 소환되고 있는 지금, 대만 출신의 학자 린위탕(林語堂)의 문장으로부터 앞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일명 ‘힐링 라이프 스타일’의 트렌드가 된 『킨포크 KINFOLK』 창간에 영감을 줬던 고전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7)에서 린위탕은 일상적 장면에서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아낸다. 특히 그는 예술과 관련하여 “온갖 분야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한다. 생활 속에서 아마추어 시인, 아마추어 사진가, 아마추어 마술사, 아마추어 음악가가 많이 나오기를 권하는 것이다. 피아노에 서투른 친구가 연주하는 소나티네가 일류 연주자의 음악회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의 경험은 오직 삶 속에서만 가능하듯 말이다.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참된 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5]  

<패터슨>에서는 매일 매일 창작을 하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다. 혹시나 린위탕이 그녀의 삶을 지켜봤다면 몹시 응원했을 것이다. 그녀는 특유의 검은색 도트무늬로 커튼이나 티셔츠를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며, 자신의 창작물을 당당하게 자랑하고 스스로 만끽하며 즐긴다. 주말 장터에서 검정 도트무늬로 장식한 독특한 수제 컵케이크를 팔아서 수익을 내는 적극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영화의 서사가 패터슨의 시 쓰기를 따라 조용하고 담백하게 흐르는 과정에서, 눈치 없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로라는 영화에 활력을 더한다. 아니, 그녀는 패턴을 따라 흐르는 일상 속에 활력을 더한다. 그녀는 일상에서 ‘예술하기’를 자발적으로 맘껏 즐긴다. 

메카스, 그리고 페터슨과 로라(혹은 그들을 만들어낸 짐 자무쉬)를 통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단어를 끌어내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여기서의 ‘아마추어리즘’이란 ‘프로페셔널리즘’에 이분법적으로 대응하는 고정된 의미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일상’, ‘생활’, ‘반복’, ‘지속성’, ‘자발성’, ‘즐거움’ 같은 단어들과 함께 어우러질 때 더욱 빛을 발하며 어떤 맥락 속에 놓이게 되는 예술가의 또 다른 모습 혹은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6] 예술이라는 것이 몰고 온 지나친 피곤함 속에 어느덧 지쳐있던 중, 이러한 몇몇 장면들은 지나치게 진지해진 예술이 그동안 놓쳐왔던 그 본질이 정작 무엇인가에 대해 아름다운 질문을 남긴다. 그렇게 나는 메카스와 페터슨으로부터, 일상과 예술이 일치하는 순간에만 발하는 황홀한 섬광을 우연히 발견했었다. 그리고 그 섬광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두고 싶어 시작된 이 글에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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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연
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 기자 및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 미술학과에서 강의하며, ‘한국미술 담론형성 세미나’(예술경영지원센터) 연구원을 맡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과 관련된 미술사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1] 『요나스 메카스: 찰나, 힐긋, 돌아보다』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은희 큐레이터에 따르면, 메카스는 카메라가 자율적으로 편집을 실행하는 것 같은 촬영방식을 개발했다. 즉 싱글 프레임 촬영과 이중 인화 이미지의 사용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24프레임의 움직임과 달리 순간에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는 다수의 순간들이 수축되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상을 남긴다고 그의 기법을 설명한다. 김은희, 「요나스 메카스, 영원의 조각을 들여다보다」, 국립현대미술관 『요나스 메카스: 찰나, 힐긋, 돌아보다』 전시 도록, 2017, p.11. 

[2] 「요나스 메카스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대담」, 위의 책, p.211. 한편, 에이미 토빈은 1964~68년 사이에 찍은 푸티지를 1969년에 편집해 만든 메카스의 <월든>을 뉴욕에서 창의적인 움직임이 활발하게 꽃피던 시기의 문화사적 기록으로 언급하며 그 의의를 강조하기도 한다. 에이미 토빈, 「요나스 메카스, 시간여행자」, 같은 책, p. 255.

[3] 메카스의 시와 영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의 삶의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 핍 초도로프의 언급이 이에 대한 부연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초도로프는 메카스의 모든 작품이 그의 열렬한 호기심, 관찰력, 자연에 대한 사랑, 문화를 향한 갈증, 강렬한 기억, 그리고 시간의 경과를 기록하려는 그의 욕구로부터 비롯되며, 20세기가 그에게 초래한 잔인한 운명, 메카스 자신을 그의 가족, 국가, 심지어 자신의 언어와 영원히 헤어지게 만든 제2차 세계대전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핍 초도로프, 「자신이 보는 것을 찬영하다: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의 책, 2017, p. 83.

[4] 『AnOther』 매거진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메카스와 자무시는 시, 영화, 그리고 메카스가 설립, 운영하는 기관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s)에 대한 대화를 이어간다. “당신의 인생에서 시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자무시의 질문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데이비드 샤피로, 케네스 코흐, 프랭크 오하라 등 뉴욕시파(New York School of Poets)부터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부터 받은 영향과 감동을 언급한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화 <패터슨>의 영감이 되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페터슨>으로 이어지는데, 흥미롭게도 메카스 역시 이 시를 읽고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직접 만나 이 시에 대한 영화 작업을 논했으나 이후 실현되지 못했음을 밝힌다. “Jim Jarmusch and Jonas Mekas on Film, Poetry and Trump,”AnOther (Spring/Summer, 2017) www.anothermag.com/design-living/9589/jim-jarmusch-and-jonas-mekas-on-film-poetry-and-trump 참조. 이 인터뷰 기사의 정보는 신형철의 글 「<패터슨〉, 혹은 시인과 시작(詩作)에 대한 하나의 성찰」(『문학동네』 제25권 제1호(통권 94호), 2018)에서 얻었다.

[5] 『생활의 발견』, 린위탕 지음, 안동민 옮김, 문예출판사, 1968, pp.250~251.

[6] 덧붙여, 삶을 예술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감독 에릭 로메르가 자신의 영화적 방식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언급하며 영화 속의 ‘일상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전례가 또 다른 영화론적 토대가 되어주지 않을까 질문을 던져본다. 물론 맥락은 다르지만, 다음과 같은 로메르의 발언은 이 글에 있어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아마추어주의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관객들 각자가 스스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세계로 그들을 초청하는 내 방식이에요. 16밀리 영상, 소수의 인물, 카메라 움직임의 부재 등 거의 ‘가족 영화’, 홈 무비 같은 것이죠.” 『에리크 로메르: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 피오나 핸디사이드 엮음, 이수원 옮김, 마음산책, 2017, pp.243~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