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씨앗에서 피어난... : 마리아노 이나스의 <라 플로르>

CRITIQUE
2020.2.27 OKULO online exclusive


영화라는 씨앗에서 피어난...
: 마리아노 이나스의 <라 플로르>

강소정



※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마리아노 이나스(Mariano Llinas)의 <라 플로르>는 2017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1부(에피소드 1과 2)가 공개되었고 2018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전편이 공개되었다. 영어자막이 포함된 Region-Free 블루레이는 2020년 1월 독일의 압졸루트 메디엔(Absolut Medien: https://absolutmedien.de)에서 출시(아래 사진)되었다. 




한편의 영화가 끝날 때 그 영화의 허구적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예컨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이나 <스타워즈>, <미션 임파서블>,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경우를 떠올려 보라. 이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을 꾸준히 봐온 사람이라면 신작 소식을 듣고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향할 것이다. 시리즈물에 속한 복수의 플롯들은 동질적인 허구적 세계에서, 대개의 경우 연대기적으로 진행된다. 신작의 관람은 희미해진 전작의 허구적 세계를 다시 가동시킬 것이다. 물론 한 편의 작품에도 시작과 끝은 있으니 전작을 보지 않고 신작을 볼 수도 있다. 전편의 핵심 정보만을 얻으려는 이는 유튜브 콘텐츠를 클릭할지도 모른다. 시리즈물의 동질적 세계에서는 한 캐릭터를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지만, 간혹 (<배트맨> 시리즈의 스핀오프라 할) <조커>의 경우처럼 배우가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캐릭터가 현실 속 배우의 속성을 허구적 세계로 끌어들이지는 않으므로 배우의 교체가 플롯 상의 이해를 어지럽히지는 않는다. 동일한 배우가 오랜 시간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에는 허구적 세계가 진행되는 동안 현실 속 그는 나이를 먹는다. 시리즈물의 전작을 몰아서 보는 특별 상영회에서 <해리 포터>를 본다고 상상해보자. 한 편의 영화 안에서는 보지 못했던 주연배우들의 외양적 변화로부터 현실의 시간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보이후드>(2014)에서 현실과 나란히 흘러가는 허구적 세계의 12년을 165분의 상영시간 안에 담은 바 있다.

이번에는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는데 필요한 상영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극단에는 방대한 상영시간으로 악명 높은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1994, 7시간 30분)나 라브 디아즈의 <필리핀 가족의 진화>(2004, 10시간 43분) 같은 영화들이 있다. 이런 작품들은 극장 환경에서 중단 없이 지속되는 관람경험을 요구하며, 때문에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에서만 드물게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곳에서 인터미션 시간을 지켜가며 한 번에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긴 시간의 영화가 있다면 차이밍량의 '행자(行者)' 연작처럼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의 영화도 있다. 말 그대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시간을 요약하면 무엇이 남을까? 디지털 시대의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서비스는 시리즈물의 몰아보기와 긴 영화의 끊어보기로 관객이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제작지원을 받은 마틴 스콜세지가 <아이리시맨>을 극장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듯, ‘영화주의자’들은 여전히 극장 상영만을 염두에 둔 채로 영화를 만든다. 

나는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무려 13시간 28분의 상영시간으로 화제가 된 영화인 마리아노 이나스의 <라 플로르>(2018)를 처음 보았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장르들과 작품을 차용한 여섯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여섯 개의 에피소드 외에 감독이 직접 등장해 앞으로 보게 될 내용을 안내하는 세 개의 장면이 있고, 엔딩 크레딧 및 에필로그는 40여분 가까이 지속된다.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제목 없이 숫자만 주어지며, 에피소드 1‧2, 에피소드3, 에피소드4‧5‧6은 각각 묶여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상영된다. 나는 오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상영이 이어진 이 영화를 비몽사몽과 흥분의 상태를 오가며 경험했다. 감독은 내가 겪은 이 상영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는 자신이 나눈 세 파트 사이에 “스무 시간 정도 간격을 두고, 각 파트 내에도 제대로 인터미션을 넣어서, 극장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라 플로르> 마리아노 이나스 인터뷰」, 『필로』 제9호, 2019)고 설명한다. 마리아노 이나스는 관람 시간의 간격까지도 영화 경험의 일부로 생각한 것이다. 영화의 긴 상영시간을 한 호흡으로 관람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라 플로르>는 자크 리베트의 <아웃 원>(1971, 12시간 9분)과 가까워 보인다. <아웃 원>은 90~100분의 상영시간에 할당된 8개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애초에 분할 상영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제작 첫 단계부터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대화를 통해 함께 영화를 구상한 점과 촬영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같은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웃 원>에서는 배경이 되는 세계가 느슨하게 지속되는 반면, <라 플로르>의 복수의 허구적 세계들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미겔 고메스의 <천일야화>(2015, 6시간 22분)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천일야화>는 11개의 상이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때로 동일한 배우가 두 개의 에피소드에서 허구적 인물과 다큐멘터리적 인물을 이중으로 수행하기도 한다.

여기서 <라 플로르>로 들어가는 질문은 이것이다. 마리아노 이나스 감독과 네 명의 배우—엘리사 카리카조, 라우라 파레데스, 발레리아 코레아, 필라 감보아—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진 여섯 개의 에피소드들을 차례로 완성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독립된 영화들로 내보내지 않고 한 편의 영화로 묶었을까? 배경이 되는 허구적 세계들이 연속적이지 않고, 동일한 배우가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공존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여섯 에피소드들을 묶은 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들을 아우르는 혹은 관류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왜 이 에피소드들을 3일간 연속적으로 보았을 때라야 감독이 의도한 경험이 가능한 것일까?



그림 1. <라 플로르>의 첫 장면. 이 구조물은 감독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영화로 들어가서 질문의 답을 찾아보자. 영화는 어느 한적한 도로가에 자리한, 뼈대만 있는 한 구조물을 보여주며 시작한다(그림 1). 이어서 이나스 감독이 큰 나무들이 있는 조용한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와 벤치에 앉는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화면 위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붉은색 노트를 펼쳐 우리가 보게 될 영화의 구조를 하나의 형상으로 그린다(그림 2). 먼저, 완결되지 않는 네 개의 에피소드들이 각각 위쪽으로 뻗어나간다. 에피소드 1은 과학자들과 미라가 등장하는 B급 호러, 에피소드 2는 헤어진 연인들의 뮤지컬 멜로에 미스터리가 가미된 것, 다섯 시간이 넘는 에피소드 3은 1980년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스케일의 스파이 영화다. 에피소드 4는 프롤로그를 찍을 당시 아직 미결정 상태인데,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관객은 영화팀이 등장하는 자기반영적 상황 속에서 카사노바와 마녀가 뒤얽힌 판타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 끝없이 뻗어나가는 네 개의 에피소드들이 시작된 지점에는 원형의 회귀운동을 하는 에피소드 5가 있다. 장 르누아르의 미완성작인 <시골에서의 하루>(1936)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네 명의 주연배우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 에피소드 뿐이다. 에피소드 6은 그로부터 아래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19세기 말 인디언에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한 여성의 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발췌한 문장들이 중간자막으로 삽입된다. (1900년에 출간된 이 책 또한 픽션이다.) 이처럼 이나스가 그려낸 서로 다른 여섯 에피소드들은 마치 한 송이의 꽃과 같은 형상을 그리게 된다.



그림 2. <라 플로르> 포스터 


주지하듯이 영화의 제목 ‘라 플로르’는 여섯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는 구조를 은유하는 꽃 모양의 형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내부의 허구적 세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배경으로 삼은 영화사(史)의 시간적 좌표들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등장한 건축물은 폐허가 된 20세기 영화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그 폐허를 구조로 삼아 이 영화가 진행된다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나스로 하여금 방대한 영화를 기획하게 한 것은 바로 이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다. 

다른 한편, 이 꽃은 각각의 이야기에 상이한 캐릭터들로 반복 등장하여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네 여성의 존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왜 복수 명사 ‘플로레스(flores)’가 아니라 단수 명사 ‘플로르(flor)’일까? 자기반영적 성격을 지닌 에피소드 4에 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마을에 발생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가토 교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토는 사건의 전말을 추적하던 중, 실종된 감독이 남긴 붉은색 노트에서 네 여성에 대해 쓴 메모를 발견한다. 이것은 그를 의아하게 만드는데, 네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채 마치 그들이 하나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토는 그것을 A, B, C, D로 구분해보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메모는 A에 대해 말할 때 C에 대해 말하는 것도 같고, B에 대해 말하다가도 페이지를 넘겨보면 D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그림 3).



그림 3. (왼쪽부터 차례로) 엘리사 카리카조, 라우라 파레데스, 발레리아 코레아, 필라 감보아


어쩌면 배우에 관한 이 혼란스러운 인식은 에피소드들의 구성적 혼란과 연관되어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20세기 ‘영화’에서 피어난 장르들을 가져와서 그것들을 자르고 뒤섞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준다. 한 편의 에피소드가 완결되지 않은 채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갈 뿐만 아니라, 에피소드 내에서도 복수의 장르들이 뒤섞인다. 이야기를 움직이는 캐릭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가 되기도 하고, 사진이나 메모를 보는 행위로 과거를 불러내는 시각적 화자와 내레이션의 층위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청각적 화자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한 편의 에피소드는 다양한 시간들이 교차하는 열린 장소가 된다.

네 배우를 하나처럼 보게 되는 것은 영화의 허구적 세계에 난 틈새와 관련되어 있다. 이 틈을 만드는 것은 허구적 세계를 의문스럽게 만드는 배우들의 비결정적인 응시다. 이 응시 장면들은 클리셰에 가까우며 장르가 전환되는 지점에 위치하기도 한다. 에피소드 1이 시작하면 차 안에서 애인과 키스를 나누던 마르셀라(엘리사 카리카조)가 갑자기 화면 바깥을 바라본다. 긴장을 더하는 익숙한 외화면 사운드가 흐르고 굳은 표정의 마르셀라는 홀로 밖으로 뛰쳐나와 울먹이며 말한다. “제발 다시는…” 그런데 그녀가 반복되길 원치 않는 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미라의 저주에 관한 메인 플롯이 이를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2에서는 가수 빅토리아의 매니저 플라비아(라우라 파레데스)에게 이 같은 순간이 있다. 빅토리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후, 플라비아에게 먼저 퇴근하라 말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을 때다. 또 다시 음악이 흐르고, 알 수 없는 표정이 된 플라비아가 샤워실로 다가가 열쇠구멍으로 화면 밖을 훔쳐본다. 이 순간 멜로 장르가 미스터리 장르로 전환된다. 그녀는 집을 나서면서 주먹으로 벽을 쾅 때린다. 그녀가 본 것은 빅토리아가 샤워하는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가 내보인 감정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플라비아와 얽힌 미스터리한 서브플롯도 이 장면을 봉합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장르적 관습으로 보이는 배우의 응시 장면들은 종종 이야기에 통합되지 않은 채 고립된 채로 남는다. 그리고 이때, 응시가 향하는 외화면 영역은 이질적인 존재론적 층위를 향해 열린다. 들뢰즈(『시네마』)에 따르면 외화면 영역은 화면과 동질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잠재성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이질적인 잠재성의 공간으로서 외화면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이접적 상태에서 벌어진 틈새를 통해서도 환기된다. 여러 국가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 3에서 배우들의 외국어 대사는 더빙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우들이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외화를 더빙한 듯한 과장된 스타일의 더빙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배우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므로 이 더빙 사운드는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일부 보조 인물들의 목소리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있는 스테레오 타입의 사운드와 구글 번역기의 기계적 사운드로 대체되기도 한다. 이처럼 응시와 이접에 의해 발생한 틈으로 허구적 세계는 ‘전체(tout)’와 어떤 잠재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픽션의 장소다(이와 관련해서는 『오큘로』 제4호(2017)에 실린 유운성의 「천일야화, 혹은 픽션 없는 세계에 저항하기」를 참고하라).

이나스는 의도적으로 배우 각각에게 다른 세 명과 구별되는 개성 있는 이미지, 바꿔 말해 인칭적 속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형성된 배우의 이미지는 뒤이은 에피소드에서 전복되곤 한다. 에피소드 1에서 마르셀라(엘리사 카리카조)는 불안해보이고 루치아 콘티(라우라 파레데스)는 그녀의 차분한 상사인데, 이 관계는 에피소드 2에서 불안한 플라비아(라우라 파레데스)와 그녀의 전 상사 이사벨라(엘리사 카리카조)의 관계로 뒤바뀐다. 에피소드 2에서 톱가수 빅토리아(필라 감보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방대한 대사를 내뱉지만, 에피소드 3에서 베를린의 영국인 스파이 테레사(필라 감보아)는 내성적인 벙어리다. 에피소드 1에서 야니나(발레리아 코레아)는 미라의 눈을 훔쳐 문제를 일으키지만, 에피소드 2에서 안드레아 니그로(발레리아 코레아)는 빅토리아를 설득해 문제를 해결한다. 감독이 제안한 관람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이전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이 미처 흐려지기 전에 다음 에피소드를 보게 된다. 이때 캐릭터들의 이러한 성격 교환은 가상에의 몰입뿐만 아니라 배우 각각에게 어떤 개인적인 속성이 부여되는 것 또한 방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에피소드 각각의 허구적 세계는 곳곳에 구멍이 나 있고, 연속적인 관람경험은 상이한 허구적 세계들의 물리적 거리를 밀접하게 만든다. 네 배우가 이루는 모종의 덩어리는 균형을 유지한 채로 이 상이한 세계들의 구멍을 통과해 돌아다니는 것 같다.

네 배우가 뒤섞인 이 덩어리는 영화 속에서 거미로 은유된다. 에피소드 4에는 카사노바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하나가 삽입되어 있다. 여기서 카사노바는 자신이 각기 다른 곳에서 만난 네 여성(역시 네 배우가 연기했다)에게 매혹되어 그들의 손에 놀아난다. 사실 그들은 ‘거미들’이라 불리는 비밀 마법 조직의 일원들이었고, 카사노바는 그들의 메신저이자 악행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이야기를 이끄는 주연이 아니라 ‘거미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조종당하는 장식이었던 것이다. 거미를 떠올려보자. 그것은 허공에 보이지 않는 줄을 쳐놓고 먹이가 걸리면 그 줄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을 감지한다. 먹이가 걸려들길 기다리면서, 그것은 표면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도 영향을 미친다. 네 배우는 에피소드 4가 시작할 때 이 영화를 6년째 촬영 중인 배우들로 등장한다. 그리고 곧바로 플롯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감독이 그들 없이 나무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팀에게 미스터리한 일이 발생하고 이야기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이 전개는 원래 마녀였던 혹은 이제 마녀를 연기하게 된 네 배우가 벌인 짓이다. 그들은 이제 이야기 속 캐릭터가 되기를 멈추고 다른 캐릭터들을 작동시키는 비가시적 힘의 단계로 내려간다. 그래서일까? 에피소드 5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영화의 잠재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거미의 은유보다 친숙한 것은 사실 마니 파버가 말한 개미의 은유가 아닐까. 파버는 형태에 속박되어 무기력해진 ‘흰코끼리 예술’과 달리, 어떤 목적도 없이 자신의 경계를 갉아먹으며 나아가는 ‘흰개미 예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장 피에르 고랭은 그의 제언을 에세이영화에 대한 논의로 끌어들이면서, 그가 “‘나’라는 항을 제거하고 대신 벌레의 본능적 에너지를 내세웠다는 사실”(장-피에르 고랭, 「논쟁을 위한 제언 Proposal for a Tussle」(2007), 『오큘로』 온라인 ☞ www.okulo.kr/2016/10/critique-001.html)에 주목한다. 즉, 영화 에세이란 “영화의 이드(Id)를 수용하는 경험”이다. <라 플로르>가 네 배우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은, 영화에 흐르는 비가시적인 힘이 심리적이고 인칭적인 것에 의해 수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에서는 형식화된 논리의 틀인 과학이 힘을 잃는다. 에피소드 1에서는 과학이 풀지 못한 미라의 저주를 주술사가 해결하고, 에피소드 2에서는 전갈의 독으로 영원한 젊음을 얻으려는 이들이 등장하며, 에피소드 3에서는 과학자가 납치되어 로켓을 만들 수 없다. 마녀가 마법을 부리는 노골적인 에피소드 4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주술과 마법이 난무하는 곳에서 틈새를 메꾸려는 논리적인 시도는 좌절된다. 그리고 영화의 비가시적인 힘은 감독이 노트에 그리고 있는 거미 그림을 점점 개미로 바꾸는 장난을 친다(그림 4).



그림 4. 에피소드 4에서 극 중의 감독이 구상한 영화 <거미들>의 구조는 개미로 바뀐다.


마리아노 이나스는 인터뷰에서 이제 사람들이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대해 말할 뿐, 픽션이나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 채 차가운 형식의 영화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Teller of Tales: Mariano Llinás on La Flor”, Cinema Scope issue 76 (Fall 2018)). 에피소드 4는 영화를 만드는 시행착오 끝에 다시 픽션으로 돌아가는 감독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네 배우 없이 나무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지만,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던 그는 우연히 벤치에 앉아있는 작업복 입은 세 남자의 뒷모습을 나무와 함께 찍게 된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뭔가 목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로소 나무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말한다. “나는 바퀴를 재발명했다.” 이 바퀴의 자리에는 ‘픽션’이 들어갈 것이다. 픽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길들을 누비며 현실을 실어 나른다. 이나스는 관념을 대체할 이미지를 현실에서 찾지 않고, 이미 현실에 있는 것들의 관계로부터 픽션의 공간을 연다. 그가 찾은 이미지는 앙상해진 채로 서 있는, 20세기에 ‘영화’라고 불리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2년 간 매주 픽션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영화를 함께 만든 엘리사, 라우라, 발레리아, 필라였다. 


노트

마리아노 이나스는 에피소드 5와 에피소드 6을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배우들과 함께 야외로 나가 찍었다고 한다. 이야기라는 꽃잎이 펼쳐져 나온 곳, 에피소드 5는 장 르누아르의 <시골에서의 하루>를 아르헨티나의 교외를 배경으로 무성영화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네 배우가 나오지 않는 것은 원작에 두 명의 여성만이 등장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에피소드 4의 마지막에 나오는, 네 배우가 어떤 캐릭터도 부여받지 않은 채 카메라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도큐먼트 필름 때문일까? 그러나 우리가 에피소드들을 연속적으로 관람하기 때문에, 부재하는 중에도 그들의 존재는 감지된다. 플롯 상의 사소한 설정들을 앞서 그들에게서 본 것들과 연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편, 이 에피소드에는 두 남녀가 숲에서 사랑을 나누는 타이밍에 비행기 곡예 축제 전단지가 숲으로 침범하고 사운드가 나오면서 흐름이 급격하게 전환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비행기 곡예 장면과 <시골에서의 하루> 오리지널 사운드가 몽타주된 것으로 표현되면서, 원작과 달리 길게 연장된다. 영화에서 사랑은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 두 개의 시간 사이의 거대한 간격 안에서 이루어진다.

에피소드 6에서 네 배우는 19세기 말 인디언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네 명의 여성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들은 도망친 사막과 목적지인 마을 사이의 산 속에 있다. 첫 장면은 바위 뒤에 숨어 있던 그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카메라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영상은 특별히 제작한 카메라 옵스큐라(로 기능하는 텐트)를 통해 촬영되어 흐릿하게 보인다. 이어서 책의 구절을 인용한 중간 자막이 나오면 우리는 이들이 두려워하며 바라보았던 것이 ‘거대한 금속 곤충처럼 생긴 낯선 기계’, 즉 카메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카메라가 연기를 내뿜고는 사라져버렸다는 자막이 나온다. 여기서 시간은 영화 탄생 이전을 향해, 거꾸로 향하는 것일까? 장면이 바뀌자 이제 화면은 점묘화처럼 보인다. 렌즈 앞에 미세한 균열들이 있는 불투명한 필터를 덧씌운 효과다. 이제 네 배우뿐만 아니라 배경까지 모두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화폭-스크린이라는 물질적 조건이 눈에 보이게 된다. 에피소드 6은 ‘라 플로르’의 줄기를 땅의 물질적 조건과 연결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이 에피소드는 영화의 탄생 이전, 영화의 토양이 된 회화의 이미지와 책의 언어로 구성된 것이다. 마침내 친숙한 세계로서 무한한 대지를 눈앞에 두고 여행은 끝난다. 사막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냈던 화자는 에피소드의 끝에 이렇게 말한다. 사막을 잊지 못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