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배회자들 : 에두아르도 윌리엄스의 <인류의 상승>

REVIEW _ DVD

디지털 시대의 배회자들
: 에두아르도 윌리엄스의 <인류의 상승>

이도훈 / 『오큘로』 편집동인




<The Human Surge>
Eduardo Williams / 2016 / 97 minutes
DVD 출시: Grasshopper Film (미국) / 영문자막


어떤 미지의 영화를 보면서 그것이 기존의 영화사에 탈주선을 그리고 있다는 직감을 받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영화적 감흥과 비평적 여운을 동시에 받은 작품으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영화감독 에두아르도 윌리엄스(Eduardo Williams)의 <인류의 상승 The Human Surge>을 거론하고 싶다. 이 작품은 2016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현재의 감독 부문 황금표범상을 수상했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관객과 만난 바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영화사를 거꾸로 빗질하면서, 오래된 영화 언어를 오늘날의 관점에 맞게끔 갱신해보려는 야심찬 시도를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단편을 제작하던 시절부터 영화제 서킷 내에서 주목받았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립영화학교(Universidad del Cine)를 거쳐 프랑스 국립현대예술작업소(Le Fresnoy)에 재학 중이던 시기에 총 다섯 편의 단편을 제작했고, 이 중 <나는 퓨마를 볼 수 있었다 Could See a Pum)>(2011)는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깜빡했어! I Forgot>(2014)는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된바 있다. 이 작품들은 청년세대, 하위문화, 거리에서의 삶, 불안정 노동 등의 주제를 어둡고 투박한 화면, 핸드헬드 카메라, 비전문 배우의 활용, 즉흥적인 연출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영화적 주제와 형식 외에도 그가 자신의 인장처럼 활용했던 걷기, 추락, 폐허, 지하실, 동굴, 어둠과 같은 영화적 모티브는 훗날 그의 첫 장편을 통해 더욱 정제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인류의 상승>은 아르헨티나, 모잠비크,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는 청년들에 관한 각각의 독립된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배열하고 있다. 영화 속 청년들은 일터와 집을 벗어나 정처 없이 거리, 들판, 정글을 걷는다. 가족들의 잔소리가 벌레의 날갯짓처럼 윙윙거리는 그들의 집은 일상의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한 안식처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며, 고용 불안정이 지속되고 단순 노동이 반복되는 그들의 일터는 삶의 활력 대신 권태와 무기력을 줄 것만 같다. 청년들은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거리로 나와 친구를 만나거나, 여가와 유희를 즐기거나, 하룻밤 노숙할 곳을 찾기 위해 배회한다. 동시에 그들은 무한한 정보와 이미지를 바라보고 수집할 수 있는, 그리고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인터넷 세계를 유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세계에서건 가상 세계에서건 영구적인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쫓는 주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 대한 최근의 비평적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우선 시네필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규범과 질서에도 타협하지 않는 연출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이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단순히 영화사를 답습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사를 거대한 아이디어의 창고로 활용해 그곳에서 발굴한 오래됨을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세련됨으로 갱신하려고 한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영화감독으로는 로버트 플래허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크리스 마커, 다르덴 형제, 데이비드 린치, 페드로 코스타 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영화는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유무형의 자본, 정보,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삶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 출연한 청년들은 항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살아가며, Wi-Fi가 터지는 곳을 찾아 배회하고, 인터넷으로 다른 지역에 있는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들에게 인터넷은 단지 가상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우주이고, 컴퓨터는 그 우주로 통하는 창(window)이며, 핸드폰은 그 우주에 접근하기 위한 시민권과 같았다. 즉 이 영화는 디지털 기기를 소유하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존재론적 증명과 직결된 디지털 네이티브에 대한 초상이자 그들이 살아가는 물질적 및 가상적 세계에 대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청년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영화적 형식에 대해 고심한다. 카메라는 별도의 조명 장비 없이 자연광에 의존한 채 시네마 베리테의 방식으로 청년들의 일상을 우연적이고 즉흥적으로 담아낸다. 이와 같은 촬영 방식을 통해 청년들의 신체적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따라서 달라지는 주변의 풍경이 하나의 영화적 볼거리로 시각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들과 현장의 사운드 간의 조화와 부조화가 연속되면서 영화적 리듬이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현실의 기록이 아니라 현실의 실황 중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 청년들의 걸음걸이는 과거 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시제로 표현되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인류의 상승>은 텔레제니(télégenie)에 충실한 영화이다. 바쟁이 1950년대 중후반에 쓴 다수의 글을 통해서 텔레제니라는 조어로 개념화하고자 했던 것은 그 당시 텔레비전 이미지의 현전성, 즉시성, 친밀성, 지성, 진정성 등과 관련이 있다. 그가 보기에 텔레비전은 현실을 시간의 지연 없이 즉시에 전달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매일 같이 가정의 거실과 안방으로 침투해 시청자들과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기존의 영화의 주제에서 제외되고는 했던 과학, 역사, 사회, 정치, 경제 등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었다. 또한 텔레비전은 유명인과 일반인 그리고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시청자를 제작에 참여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웃집에 거주하는 식료품점 주인과 농부조차도 전문가로 초빙되어 자신들이 삶에서 터득한 지혜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 이와 같이 형식적으로는 생방송의 미학을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지성과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쟁은 텔레비전이 민주적인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평등하듯이 모든 인간은 텔레비전 앞에서 평등하다.” 

<인류의 상승>에서 라이브니스(liveness)는 과거 텔레비전의 매체적인 특성을 굴절된 형태로 재매개한다. 이 영화 속에서 청년들은 인터넷 실시간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익명의 시청자들과 문자 또는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또래문화 혹은 하위문화를 형성한다. 이는 바쟁이 기대했던 이미지의 현전성과 즉시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정작 그가 기대했던 친밀성, 지성, 진정성 등은 굴절시킨 것이다. 인터넷 실시간 방송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제작자와 시청자의 기호, 취향, 욕망 등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는 친밀성, 지성, 진정성은 때에 따라서 용도 폐기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인터넷 실시간 방송은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보상과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상호호혜보다는 뚜렷한 욕망과 이윤을 동기로 움직이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서 콘텐츠를 교환하며,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방송을 제작하는 청년들은 시청자로부터 어느 정도의 금액을 받고 신체 일부를 노출하거나 유사 성행위를 보여준다. 얼마를 주면 엉덩이를 보여주겠다, 얼마를 주면 구강성교를 하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자극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면서 신체를 성적 대상, 추상화된 자본으로 전환하는 일종의 쇼비즈니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과 대중적인 영화들이 시장의 욕망에 따라 서사적 개연성 없이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지속해서 전시하는 행태와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이 영화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와 그것에 대한 경험 또한 영화적으로 매개하고 있다. 그것은 저렴한 디지털 장비와 프로그램 그리고 인터넷의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이미지가 제한 없이 이동하고, 연결되고, 확산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표류하는 모든 신호들은 상호 간에 무제약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콘텐츠들은 원본과 출처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르고, 붙이고, 뒤섞는 과정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 없이 무제한적으로 확산된다. 헨리 젠킨스를 포함한 많은 미디어 문화 연구자들이 강조한 바 있듯이 웹 2.0 시대의 콘텐츠의 가치는 한 곳에 점착되어 있을 때보다 여러 곳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더 높아진다. <인류의 상승>은 바로 이 인터넷 세계의 이동성, 연결성, 확산성을 영화적 개념으로 활용하는 범례라고 할 수 있다.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아르헨티나 청년들의 삶을 다루는 첫 번째 에피소드와 모잠비크 청년들의 삶을 다루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만나는 지점이 있다. 한 청년이 자신의 거실에서 모잠비크의 청년들이 진행하는 인터넷 실시간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에 세 개의 인터넷 창을 띄워놓고 산만하게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인터넷 실시간 방송에서 수위 높은 유사 성행위 장면이 나오자 그 방송을 전체화면으로 전환한다. 그 즉시 카메라가 비추던 컴퓨터 모니터는 영화의 스크린을 매개하게 된다. 인터넷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과 저곳을 동시적으로 현존하게 한 덕분에 영화는 아르헨티나에서 모잠비크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투명하게 매개되고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세계는 불안정하다. 영화는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 사용이 습관화된 일상 이면에 그것의 중독과 스캔들이 은폐되어 있음을 반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 속 청년들은 항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들의 핸드폰은 잦은 고장을 일으킨다. 핸드폰이 고장 났을 경우 청년들은 현실 세계의 친구들은 물론 가상 세계의 친구들과도 단절을 겪는다. 그들에게 인터넷에 접속되느냐 단절되느냐는 그들의 실존적 상황과 직결된 문제이다. 그들의 불안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접속되느냐 단절되느냐’의 문제가 되며, 그들의 존재론적 인식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대체된다. 이와 관련해서 이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정글을 빠져나온 한 여인이 인터넷 카페를 찾아 한적한 시골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년들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어쩌면 이들 디지털 시대의 배회자들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데이터와 신호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들로부터 은총과 구원이 있기를 막연하게 바랐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