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의 <호수길>, <환호성>,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에 관하여

CRITIQUE

이 지루함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 정재훈의 <호수길>, <환호성>,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에 관하여

이도훈 / 『오큘로』 편집동인




침묵과 지루함

정재훈과 그의 영화에 관한 말들은 종종 입소문의 형태로 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영화적 세계를 다루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첫 장편인 <호수길>(2009)로 지금은 사라진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에서 블루카멜레온상 특별 언급을 받고 이에 힘입어 비평계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환호성>(2011)을 시작으로 점점 어두워지고, 투박해지고, 불친절해진 그의 영화에 대해 평단과 관객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212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는 그의 신작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2017)에 대한 평가는 미적지근했다. 현재까지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일부 영화제의 프로그램 노트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관객 평가를 찾아보아도 상황은 비슷하다. 나는 정재훈의 장편 영화, 특히 그의 신작을 둘러싼 관객과 평단이 보여준 난감함, 피로감, 침묵을 마주하던 중 문득 이러한 반응이 그가 이미지를 구성하고 체계화하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재훈의 영화는 바라보기의 지루함과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상투적인 표현들을 먼저 짚어보자. 일반적으로 한편의 영화를 관람한 후에 지루하다고 말할 때는 그 작품의 질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그 영화 너무 지루해”라는 말 속에는 한 작품에 영화적 재미와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영화사가들이 지적하듯이 이미 보드빌 시절부터 영화는 관객이 느끼는 지루함을 극복하고 그들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언어, 문법, 형식을 만들기 위해서 고투해왔다. 그러나 영화의 지루함에 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맥락에 따라서 긍정적인 뉘앙스로도 바뀔 수 있다. 이미 영화적 전통이자 규범이 된 서사, 양식, 그리고 관객성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정재훈의 영화도 지루함을 영화적 언어로 차용한 경우에 속한다. 그의 영화는 현실의 이미지에 대한 지루한 감각 상태를 지각할 수 있는 영화적인 형식을 추구하며, 현시대가 일상적으로 지루함을 유발하도록 조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일깨워주고 있다. 또한 그의 영화는 집중과 몰입을 유발하는 상업영화의 관람방식으로부터 일탈해 대안적인 형태로 지루함을 관람 방식의 하나로 제안한다. 

고대로부터 지루함이라는 것은 에세이적인 성찰의 소재였다가 근대를 기점으로 하나의 시대적 담론으로 격상된다. 조너선 크래리는 『지각의 유예: 주의, 스펙터클, 그리고 근대 문화』에서 인간의 감각적 경험의 기반이 흔들리는 19세기를 가리켜 “지각 기관의 혁명화”가 이루어지던 때라고 말한 바 있다. 과학과 수학을 앞세워 신의 공백을 합리적 이성으로 채우려는 시도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기계문명의 발전에 힘입어 시공간의 경험이 급진적으로 바뀌던 그 시대는 인간의 지각 경험의 객관성, 안정성, 확실성이 무너지던 때다. 특히나 근대적 의식의 흐름이 몰입에서 분산으로, 주의의 집중에서 분산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크래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중심에 있다. 실제로 게오르크 짐멜, 가브리엘 타르드, 에밀 뒤르켐과 같은 사회학자들, 문예 비평가였던 발터 벤야민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그 외 철학자, 생리학자,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등이 정신 분산, 권태, 무기력, 지루함, 우울, 불안, 공포 등에 관해서 고찰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지루함이라는 것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근대적인 삶의 리듬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루함의 철학』의 저자인 라르스 스벤젠은 지루함을 근대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불면의 상태에 빗대기도 했다. “깊디깊은 지루함이란 현상학에서 보자면 불면의 상태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공허에 사로잡힌 채, 자아가 어둠 속에서 제 정체성을 잃고 마는 그런 불면의 상태.”


<호수길>(2009)


정재훈의 영화 또한 지루함과 그것의 비유적 상태인 불면을 그 자신의 구성 원리로 갖는다. 그의 전작인 <호수길>은 낮과 밤의 변증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시 은평구 응암 2동의 재개발 과정을 에세이적으로 접근한 이 영화의 전반부는 재개발이 본격화되기 직전 생기 넘치는 동네의 낮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중후반부로 넘어가면 영화는 카메라를 든 산책자의 시선으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마을의 밤 풍경을 보여준다. 낮이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한 시간이라면 밤은 죽어가는 것들을 위한 시간이다. 이 대립적 설정의 변증법은 밤의 논리가 낮의 논리 안으로 침투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종합의 상태에 이른다. 5분여에 달하는 롱 테이크로 담아낸 한 집이 포크레인에 의해 철거되는 과정 속에는 도시 재개발의 야수적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이때 카메라는 단 한 번의 느릿한 패닝을 제외하고는 부동의 자세를 유지한다. 카메라는 눈앞의 참혹함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재개발이 진행된 한 마을의 변화를 기록했던 그 카메라에게 어제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단절이 아니라 지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폐허가 되어가는 과정을 냉정하게 지각하는 자세는 사실상 이 영화가 시종일관 보여주었던 오후의 나른함에 대응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낮의 나른함과 한밤의 적막함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자리에서 만나는 그 상태는 시간의 지속에 붙들려 있는 지루함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감독의 주관적인 경험도 객관적인 인식도 아닌, 그렇다고 안으로부터 오는 것도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단지 재개발이라는 그 특수한 실존적 상황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일상의 나른함과 지루함 등에 관한 고찰은 <환호성>으로 이어진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도시 공동체가 아니라 노동하는 신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정재훈 감독은 자신의 두 번째 작품을 통해 노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의 단조로움이 인간의 신체를 좀먹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인과적이고 극적인 전개를 배격한다고는 해도,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그 얼개를 그려볼 수 있다. 첫째, 이 영화는 SF의 변종으로 “한국이라는 외계 공간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펼치는 이야기”(강덕구, 「모험, 산, 환상방황, 개, 소음, 빛: 정재훈 감독과의 대화」, 『오큘로』 5호, 36쪽)로 볼 수 있다. 영화 속 외계인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 청년으로 변장해 동시대에 동화된 삶을 살아간다. 그는 낮에는 부지런히 일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산책을 한다. 그는 여름에는 당구장에서 그리고 겨울에는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느 지구인들이 그러하듯이 생계 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둘째,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법을 따르는 작품이다. 영화는 20대 청년이 노동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가 자신의 신체를 관리하고 규율하면서 노동을 재생산 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관찰자적인 시선 속에서 한 청년의 삶의 주기가 잠자기, 일어나기, 밥 먹기, 출근하기, 일하기, 그리고 약간의 휴식의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포착해난다. 이 청년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삶은 노동의 체계라고 불릴 수 있는, 즉 노동을 위한 에너지의 투입과 산출의 피드백 루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환호성>(2011)


<환호성>에서 삶을 위한 노동과 노동을 위한 삶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노동의 흐름이 삶의 흐름과 평형과 안정을 이루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오늘날처럼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삶에서 일상의 모든 행위들(휴식, 여가, 수면, 식사 등)은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영화는 잠들어 있는 청년의 신체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밤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 상태에서 숨소리를 내고, 코를 골고, 몸을 떠는 모습은 그가 낮 시간 동안 노동을 위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모습과 겹친다. 여기서 노동하는 인간의 신체는 노동의 생산과 노동의 재생산이 교대로 발생하는 장소다. 이는 인간의 신체가 단순히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니라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어떤 체계의 수단이자 그것의 압축판임을 암시한다. 노동에 예속되어 버린 삶 혹은 노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삶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 영화 후반부, 청년과 외계인이 하나의 몸을 매개로 울분을 토하듯이 몸부림치는 모습에서 자본에 예속된 인간의 신체의 절규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노동을 소명인 동시에 원죄로 안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노동의 조건과 삶의 실존에 대한 정재훈 감독의 비판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노동의 영겁회귀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의 단조롭고, 지루하고, 피곤한 삶의 리듬 속에서 죽음의 리듬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각체계의 불안정성

지루함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이 분명한 일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같은 자리를 서성이거나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과 관련이 있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강의를 듣거나, 하릴없이 TV나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습관적으로 시계를 쳐다보면서 시간이 더디게 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객관적인 시간은 경험적으로 주관적인 시간 속에서 뒤틀린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호수길>과 <환호성>은 각각 재개발과 노동의 지속, 반복, 재생산을 통해 삶의 단조로움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두 영화의 문제의식은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삶의 목적과 좌표를 잃은 인간의 경험을 감각적으로 변환해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말한다. 실제로 정재훈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이 어느 산 속에서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을 겪은 적이 있는데 시간은 가는데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괴현상” 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는 극장이나 미술관에서 상영될 때마다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관람 시 유의 사항을 알려주고는 했다. 이 영화는 1부, 인터미션, 2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1부와 인터미션 사이에는 입장과 퇴장이 자유롭다. 인터미션은 물리적으로 긴 러닝 타임을 견뎌내야 할 관객들을 위한 배려다. 이는 이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지루하게 관람해도 무방하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영화 관람인지를 따져 묻기보다는, 이 영화가 기존의 규범적이고 정상적인 관람 방식을 파열시키고자 한다는 점에 더 주목하자. 그리고 이 영화가 몰입적이고, 분산적이고, 지루한 관람 중 그 어떤 것에도 편향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영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2017)


이 영화의 1부는 시각적 몰입과 분산에 관한 실험의 장이다 . 약 1시간 2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이 영화의 1부가 보여주는 것은 특정 산의 풍경이 전부이다. 물론 컷의 전환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은 산의 형태 변화가 있다. 이러한 영화적 이미지의 지속과 변화로 인해서 관객들은 회화 작품에 빠져들듯이 영화의 이미지에 관조적으로 침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1부는 사운드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극적인 사건이나 인물이 없는 상태로 진행된다. 오로지 바라보는 데에만 집중해야 할 관객들은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영화의 1부는 풍경영화로 분류 가능하지만 그러한 장르적 기대마저도 철저하게 배반한다. 최근의 풍경영화들처럼 특정 풍경과 대상을 스펙터클화하지도, 그렇다고 그것을 지질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역사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감독은 자신이 보여주는 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다는 관객들이 그것을 어떤 영화적 관람 조건 속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즉, 이 영화의 1부는 풍경영화가 조장할 수 있는 특정 대상과 지역에 대한 코드화 자체를 부정하면서, 오로지 카메라가 기록한 ‘지금’, ‘여기’의 상태의 상태만을 전달하려고 한다. 때문에 주의력을 잃고 한눈을 팔다가, 잠시 졸다가,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라봐도 그곳에는 텅 빈 기표로 제시되는 산이 있을 뿐이다. 

정재훈이 보여주는 산에는 이름이 없으며, 그에게는 대상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감독은 어떤 무명의 산이 독립된 개체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체적 환경을 이루고 있다는 현상학적 사실만을 중시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산의 내부와 외부를 둘러싼 환경들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지각 정보를 제공하는 원천이다. 그 산은 빛, 구름, 바람에 의한 역학적, 화학적, 광학적 에너지의 흐름과 변화 속에 위치하고 있다. 관객들은 영화가 제시하는 시각적인 정보를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영화 속 산에 대한 감각상태와 지각을 형성한다. 이때 동일한 장면에 대한 관객의 지각은 그가 영화를 통해 어떤 정보를 획득하고 또한 그의 주의력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때문에 이 영화 속 산은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주변 환경에 의해서 그리고 관람자의 지각에 따라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실체로 거듭난다. 산은 그저 산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변화와 생성을 겪고 있는 것이다. 

2부 또한 바라보는 것의 고단함에 대해 탐구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사운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1부의 시각적 지각에 대한 실험을 시청각적 지각에 대한 실험으로 확장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부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분 가능하다. 사냥꾼과 사냥개의 산행, 조선소의 풍경, 그리고 정재훈 감독과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이중 사냥꾼과 사냥개들의 산행의 일부를 살펴보자. 여기서도 정재훈의 카메라는 어떤 행위의 목적성보다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과정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사냥꾼은 산의 초입에 도착해서 사냥개들을 풀어 놓는다. 우리에서 나온 사냥개들은 신이 난 듯이 주변을 뛰어다니거나 사방의 냄새를 맡는다. 그 순간 사냥개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 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의 해방을 만끽한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은 이내 목적을 잃고 방황한다. 감독은 사냥꾼과 사냥개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종종 사냥개들의 상태를 관찰하는데, 이 과정에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개입해 들어온다. 그것은 산행이 처음이었던 한 사냥개가 주인에게 꾸지람을 듣고 뒤처지는 일이었다. 이미 산행에 익숙했던 사냥개들은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사냥물을 쫓기 위해 정향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반면, 산행이 처음이었던 사냥개는 훈련된 감각을 결여한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냥개는 온갖 자극과 정보가 넘쳐나는 산에서 자신의 감각과 신경을 곤두세우지 못하고 의기소침한 상태, 더 정확히 말해 감각이 무뎌진 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본다면, 사냥개들에게 산은 새로운 감각을 획득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자극으로 인해서 감각의 상실을 겪는 곳이기도 하다. 

비슷한 관점에서 2부의 조선소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부분은 감독이 실제로 3개월 동안 어느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촬영 기기의 열악함으로 화면의 해상도가 낮고 종종 데이터가 상실된 장면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 흐릿하고 일그러진 화면은 조선소 풍경을 추상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적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이 조선소라는 사실에 의심을 갖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는 선박들과 그 선박의 내부에 들어가서 작업하는 인부들의 모습, 그리고 조선소를 감싸고 있는 빛, 열기, 소음들이 모두 어우러져 그것이 조선소임을 지각 가능한 형태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재훈이 보여주는, 그리고 그가 지각 가능케 하는 조선소는 신호, 정보, 에너지가 과잉된 상태이다. 그곳은 조선소를 구성하는 각각의 단위와 개체들이 다양한 자극을 산출한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인간의 지각은 과잉된 자극으로 인해서 무뎌지게 된다. 조선소의 인부들이 불꽃이 튀고 소음이 난무하는 그러한 작업장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전문성과 공정성을 유지할 있는 것은 그들이 장기간의 숙련 기간을 거치면서 조선소에 최적화된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소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에게 조선소의 초과적인 자극과 정보는 그들의 지각 체계를 교란시킨다. 이로 인해 조선소는 그것의 실체와 존재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로 보이게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 조선소는 주변 환경을 집어 삼키면서 다른 모든 가능한 형태로 변화해나갈 수 있는 마그마와 같은 무정형적인 것으로 변환된다.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2017)


이처럼 정재훈의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는 특정 자극, 정보, 신호, 에너지의 지속과 그것들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당하는 인간의 불안정한 지각 상태를 탐구해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제 인터미션을 살펴보자. 이 영화는 2부를 먼저 만들고 난 다음 1부, 인터미션의 순서대로 작업을 했다. 인터미션은 문자 그대로 1부와 2부 사이의 휴지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1부와 2부를 관통하면서 두 개의 독립된 세계가 갖고 있는 주제 의식을 이어주는 일종의 관문이기도 하다. 이 인터미션은 인터넷 가상공간의 정보의 흐름을 시청각적으로 형상화한 CGI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은 일기예보와 주식투자 프로그램과 같이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또 찾을 수 있는 사운드와 영상을 활용했다. 일기예보와 주식투자 모두 우연적인 현상들에 대한 통계적 확률을 산출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과학적이고, 수학적이고, 통계학적인 사고들은 번번이 안정과 불안정을 오가는 정보와 자극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우연은 길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종종 예측과 기대를 빗나간다. 물론, 정재훈 감독은 그 우연적인 내기의 승패에는 개의치 않는다. 대신 그는 인간의 본성과 그들의 실존이 주변의 무수한 자극과 정보들에 포위된 상태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도 무기력이 극에 달해 자신이 지루함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는 그러한 상태 말이다.

지루함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거나, 쾌락과 오락을 통해 기분전환을 하거나, 목가적인 환경 속에서 한가함을 찾거나, 예술을 통해 심미적인 위안을 얻거나, 그도 아니면 단순노동을 반복하면서 지루함 그 자체를 견뎌내는 것 등으로 해소 가능하다. 그러나 정재훈 감독은 지루함에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지루함을 해소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간혹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밀렵꾼의 자세로 새로운 감각이 있을 법한 공터, 폐허, 일터, 놀이터 등을 전전하지만 그러한 곳에서도 지루함이 그림자처럼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지루함은 벗어날 수 있는 것도 극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닌 삶의 일부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따라서 정재훈의 장편 영화는 지루함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실존적인 동시에 영화적인 고찰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