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로 (다시) 보기: 김희천의 <탱크>

REVIEW

거울로 (다시) 보기
: 김희천의 <탱크>(2019)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


[사진 1] 김희천, «탱크» 전시전경, 2019, 아트선재센터, 사진: 김연제


인간이 자기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행위 중 하나가 거울 보기이다. 또 다른 행위를 들자면 눈앞에 놓인 자신의 손을 움직여보며 그 움직임이 자신의 시각과 동기화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있다. ⟨탱크⟩의 주인공은 러닝타임 내내 이 두 가지의 자기 확인 행위를 반복해서 수행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시뮬레이션 바깥에서는 거울 셀피를 계속해서 촬영하고, 시뮬레이션 내에서는 자신의 손을 움직여보고 자꾸 바라본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자기 확인을 추동케 하는 것이 불안감만은 아닌 것 같다. 거울 셀피라는 이중의 자기 확인 속에서 그는 실사와 그래픽의 혼종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얼굴에 매료된 나르키소스처럼 보인다.

보통의 셀피는 카메라와 촬영하는 자(이자 피사체)가 직접적으로 관계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반면, 거울 셀피에서는 카메라를 든 사람과 카메라 사이에 부가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거울에 맺히는 상이다. 즉 거울 셀피는 피사체가 거울에 상으로 맺히는 과정과 거울에 맺힌 상이 다시 카메라를 통해 이미지로 출력되는 과정이라는 이중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인 거울 셀피는 전자의 과정에서 현상되는 얼굴과 후자의 과정에서 현상되는 얼굴이 동일하다는 전제 위에서 기능한다. 나의 얼굴이 거울에 맺히는 얼굴과 같고, 그것이 다시 카메라에 맺히는 얼굴과 같다는 전제가 있기에 ‘거울 셀피’라는 것이 가능하다. 



[사진 2] 김희천, «탱크» 전시전경, 2019, 아트선재센터, 사진: 김연제


⟨탱크⟩의 동영상-거울-셀피는 한층 더 복잡하다. 카메라가 인식한 얼굴 위에 메이크업을 자동으로 덧씌우는 어플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거울에 비치는 얼굴과 스마트폰 화면에 나타나는 얼굴이 서로 달라진다(사진 2). 거울 속의 얼굴이 실제 얼굴의 비교적 정직한 반영이라면, 스마트폰 상의 얼굴은 그것을 다시 변형시킨 것이다. 때문에 피사체이자 촬영의 주체는 두 개의 얼굴을 획득하게 된다. 하나는 실제와 거의 다르지 않을 거울 속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손쉬운 디지털 변형의 결과로 나타나는 얼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의 얼굴이 그 직접적인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이 거울 속의 이미지란 점이다. 거울의 이미지는 ‘실사 촬영본’의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김희천은 본 작업에서 거울 상의 이미지는 쏙 뺀 채 오직 ‘이중으로 굴절된’ 스마트폰 화면상의 (예쁘장하게) 변형된 얼굴만을 보여준다. 이것은 꽤 동시대적인 함의를 갖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실제로 오늘날 디지털 변형을 거친 인터넷상의 이미지들은 특이한 매력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령 트위터에 ‘움짤’ 사진을 올리면, 종종 데이터모셔 계정(@DATAM0SHER)이 마치 퍼포먼스라도 하듯 해당 움짤을 데이터모싱(datamoshing)하여 멘션을 단다. 혹은 이미 유튜브에서 마치 튜토리얼처럼 소개되고 있듯 어떤 사람들은 멀쩡하게 찍힌 사진 위에 포토샵으로 조악한 변형(소박한 도형을 만들어 사진 위에 얹는다든지)을 가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희천의 선택, 즉 ‘거울상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거울상의 변형만을 보여주기’는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울상의 얼굴과 그것을 변형한 또 다른 얼굴이라는 관계는 <탱크>의 극중 시뮬레이션 훈련에서도 반복된다. 송여름이라는 다이버의 마지막 다이빙 기록 영상에는 그의 죽음이 담겨 있다.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1인칭 시점의 화면을 통해 관객은 그가 다이빙 도중 길을 잃었으며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고 가쁜 숨을 참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 기록 영상의 오른쪽 상단에는 러닝타임이 덧붙여져 있다. 해당 기록 영상을 토대로 ⟨탱크⟩의 주인공은 부유 탱크 속에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한다. 훈련의 목적은 쎄노떼라는 해저 동굴에서 유실된 송여름의 시신을 찾아 그의 빈 무덤을 채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훈련 초반에는 이 기록 영상을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진행했었으나 이내 훈련의 내용이 바뀐다. 훈련 도중 그가 시뮬레이션 상의 손을 바라보며 그것이 자신의 '없는 손(absent hand)'에 동기화된 '픽셀화된 송여름의 손'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상기하고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사진 3). 송여름이 남긴 실제의 기록은 그래픽적 신체와 그래픽적 환경으로 대체된다. 그것이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시뮬레이션 훈련 장면의 주된 이미지가 된다. (물론 송여름이 남긴 기록 영상의 이미지나 사운드가 종종 그 위에 오버랩되기도 한다). 결국 시뮬레이션 훈련 자체가 실제의 기록 영상을 토대로 한 것과 그것을 그래픽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훈련 내용이 바뀌었다고 해서 주인공의 혼란이 멈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혼란은 가중된다. 손은 1인칭 시점(아마도 머리 정면에 달린 카메라의 시점)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고, 시뮬레이션 상에서 죽음을 겪고 난 뒤 주인공은 기억을 잃고, 2부의 마지막에서는 송여름이 남긴 기록 영상과 그래픽적 환경에서의 훈련 영상이 겹쳐진다. 죽은 송여름과 그래픽적으로 잔존하는 송여름과 주인공의 존재하는 몸과 시뮬레이션 상에는 없는 몸이 훈련 기간 중에 한 데 뒤섞인다. 이는 남성인 주인공이 계속해서 메이크업 어플이 적용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촬영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 3] 김희천, <탱크> 스틸 이미지, 영상 설치, 스테레오, 컬러, 41분, 2019, 작가 제공


그리고 마지막 3부에는 ‘자동화의 날(Automation Day)’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자동화의 날은 케이팝 댄스에 몸을 맡김으로써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멕시코의 한 컬트 집단이 만든 날이다. 주인공은 이 집단의 일원인 친구 카스로부터 소개를 받아, 자동화의 날을 즐기는 그들을 기록한다. 자동화를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하는 자유란 역설적이게도 자율성을 극도로 포기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마치 자율주행자동차에 타면 “언제 어디 도착하”는지 알게 되고 어느새 자동차에 대해선 잊게 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자율주행탈것, 자율주행자동차가 되”어 몸에 대해 잊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그들에게 도착지보다 중요한 것은 주행 중에 자신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다.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3부의 초반부가 ⟨탱크⟩에서 유일하게 관찰자 시점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탈신체화를 유토피아적으로 전망하는 입장의 외부에서 ‘기록’하는 주인공의 위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카스와 그의 친구들에게 ‘자동화’가 아무리 급진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띠고 있다 해도 주인공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타다’에 승차해서 내비게이션이 읊어주는 경로와 도착 예정 시간을 들으며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는 것일 테다.

이렇게 ⟨탱크⟩는 가상과 신체라는 모티브를 짝지어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 변주는 앞서 살펴보았듯 메이크업 어플과 얼굴, 시뮬레이션과 손, 케이팝 댄스와 몸이다. ⟨탱크⟩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는 이 탈신체화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자율주행탈것으로서의 무빙이미지 또한 생각해 볼 법하다. 아트선재센터 3층 전시장에 놓여 있는 빈백에 일단 한 번 몸을 누이고 나면, 눈앞에 놓인 영상이 한 바퀴 다 돌 때까지 관객은 편하게 앉아 자극적인 이미지들과 전시장 바닥을 울리는 사운드에 몸을 맡기게 된다. ⟨탱크⟩의 편집 리듬에 따라 겹쳐지는 프레임들을 재빨리 읽어내고, 캄캄한 해저 동굴 잠수 장면과 번쩍이는 빛 속에서 춤추는 이들을 기록한 장면의 사운드의 울림이 신체에 그대로 와닿는 것을 느끼면서 관객 또한 주인공처럼 일종의 시뮬레이션 훈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이중으로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열어젖히자마자 눈앞을 압도하는 어둠이, 감각차단탱크에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는 주인공과 관객을 동기화시키고자 하는 장치라는 것은 명백하다.

김희천에게 ‘가상’이라는 환경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뮬레이션’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익은 케이팝 댄스에서도, 혹은 블랙박스 속의 무빙 이미지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영상 막바지에 해저 동굴이 클라인 병처럼 주인공의 뒤편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는 대사가 들어간 것은, 가상과 실재가 같은 위상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상(동굴이라는 가상만큼 오래된 가상이 있겠는가)에는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2019년 11월 29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김희천의 개인전 «탱크»는 2020년 2월 9일까지 이어진다. 문의는 www.artsonje.org / (02) 733 8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