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매개하는 몸과 매개되는 몸
: 퍼포먼스에서의 굴절에 관하여
이한범 / 『오큘로』 편집동인
※ 이 글은 2018년 2월 2일부터 2월 11일까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전시/퍼포먼스 「직사각형 둘레에서 글쓰기 혹은 움직이기」(기획: 김선옥, 용선미 / 참여작가: 정지돈, 조형준)와 관련해 발간된 동명의 소책자에 실렸던 것이다. 본 전시/퍼포먼스와 관련해 기획자 가운데 한 명인 김선옥은 "퍼포먼스(2.2~2.3)는 안무가 조형준이 그간 실연했던 퍼포먼스에서 선보였던 안무 중 일부 동작을 재현하고, 이를 소설가 정지돈이 실시간으로 텍스트로 기록하는 것으로 구성"되며 퍼포먼스가 끝나고 이어진 "전시(2.6~2.11)는 조형준이 예전 퍼포먼스에서 실제 사용한 일부 오브제와 이번 조형준의 움직임을 기록한 정지돈의 텍스트가 삽입되는 책으로 이루어지며, 책에는 두 명의 외부 필진(안소현, 이한범)이 참여한 글이 실려 있다"고 밝히고 있다. 기획자들의 의도에 따라, 이 글은 조형준과 정지돈의 퍼포먼스가 실제 이루어지기 전에 전시/퍼포먼스에 대한 구상만을 전달받은 상태에서 씌어졌다. 퍼포먼스 기록영상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퍼포먼스라는 단어의 용법은 공연 예술을 지칭하는 것에서 나아가 사회적, 문화적 양태를 서술하는 데까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퍼포먼스라 일컫는 것들에 내재된 어떤 공통적인 성질을 도출해볼 수는 있을 텐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움직임’일 것이다. 반세기 전, 일군의 서구 미술가들은 회화나 조각 등 정지된 작품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작가 자기 자신과 관객의) 몸이라는 점을 깨달았고 적극적으로 그 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흩뿌리는 자신의 모습을 과감히 드러내어 사진에 기록했고, 리처드 세라는 납을 녹여 직접 전시장 곳곳에 던져 놓고는 굳혔다. 로버트 모리스는 거대한 기하학적 사물만을 전시장에 덩그러니 놓아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몸과 몸의 움직임에 관한 수많은 예술적 실험 중에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의 매개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 작업들이다. 요나 웨스터만이 (시각예술에서의) 퍼포먼스를 ‘인프라 미디엄’이라 정의할 때, 이는 직접 행위의 효과와 (이미지로의)매개 이후의 효과가 퍼포먼스에 모두 잠재되어 있음을 뜻한다.[1]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축의 공존은 재현의 측면에서 보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직접성이 원본을 신성시한다면, 매개의 과정에서는 원본의 굴절로부터 비롯되는 차이와 간극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즉 몸과 몸의 움직임은 오늘날 여전히 중요한, 아니 오히려 더 첨예할 수밖에 없는 성상(聖像)을 마주하는 입장에 대한 리트머스이자 그것이 관계된 전반적인 재현 체계의 복잡성 혹은 모순을 드러내주는 메타-매체이다. 그리하여 이 매체는 수행됨과 수행함의 동시성이라는 독특한 위상에서 효력을 발생시킨다. 몸이 굴절된다는 것은 그것을 숭배하는 누군가에게는 현존성이 상실된다는 콤플렉스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몸을 아무리 충실히 의미화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살갗조차 뚫고 들어갈 수 없다. 오로지 그 굴절의 각도, 벌어지는 틈 사이에서만 몸을 둘러싼 세계의 문제는 드러난다. 그 틈은 지시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일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상황이며, 재현에 의한 시차적 간극이다. 몸이 시차적으로 도달할 때 우리는 몸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유가 가능하고, 지금 여기에서 몸이 위치한 자리를 가늠할 수 있다.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브루스 나우먼, 1967)
여기서 하나의 형상을 떠올려 본다. 바로 브루스 나우먼의 스튜디오 필름(studio film) 연작 중에서도 1967년과 1968년 사이에 제작된 일련의 행위-영상에서의 몸이다. 각각이 약 10여분 정도인 이 영상 작업들은 제목이 그 자체로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앞에 선 자기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지시문을 뜻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스튜디오를 걸어 다니며 바이올린의 음을 연주하기>,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 <정사각형 위에서 춤을 추거나 운동하기>, <리듬을 바꿔가며 바닥과 천장 사이에서 두 개의 공을 튀기기> 같은 식이다. 안드레 레페키는 나우먼의 스튜디오 필름 시리즈에 대해서 “언캐니(uncanny)한, 춤(dance)이라기보다는 안무적인 것(choreographic)”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춤과 안무를 구분한 것은 중요해 보이는데, 레페키는 뒤이어 ‘안무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부연한다. 그것은 “미리 짜인 절차를 엄격하게, 순서에 따라, 그것에만 몰두하여(monomaniacal) 이행함으로써 지시되는(indexed) 것”[2]을 뜻한다. 지시한다는 표현은, 행위자의 몸이 살(flesh)의 현존으로서의 신체로부터 기호 체계 안의 교환 가능한 (비)언어적 요소로 전환됨을 암시한다.[3]
안무를 언어라고 명명할 때, 이는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텍스트로 쓰여진, 제목과 등가적인 지시문을 움직임이 따르는 구조라고 볼 수 있는 경우이겠고,[4] 다른 하나는 움직임이 텍스트(제목)의 수행적 결과로서 발생했다는 경우이겠다.[5] 나우먼은 자기 자신이 전제한 조건-언어(지시문)를 자기 자신의 몸을 매개삼아 작동시켰는데, 이에 대한 자넷 크레이나크와 레페키의 공통적인 평가는 그의 안무가 언어의 수행성, 즉 몸을 움직이게끔 만드는 언어적 발화의 힘과 관련되어 있음을 통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이 시사하는 바는 안무라는 것은 신체를 (“엄격하게, 순서에 따라, 그것에만 몰두하여”)움직이게 만듦으로써 (“지시”하는 것으로 기능하는)언어적 기호의 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운동성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안무가 언어와 상호적이라 할 때 흥미로운 점은 텍스트가 몸으로 구현된다는 자리 이동의 문제라기보다는, 안무를 통해 몸 자체가 스스로를 기호화시킨다는, 몸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수행적 힘이다.
나우먼 작업의 이러한 요소는 몸 혹은 움직임은 무엇을 매개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매개되는가에 대한 매체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질문으로 읽힌다. 몸이 안무를 매개함으로써 기호화된다는 사실이 하나의 대답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가능한 대답은 나우먼의 안무가 영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영상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매개적이다. 영상은 과거의 움직임을 언제나 투명하게 직접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영상이 현재화하는 것은 몸과 움직임의 이미지다. 이 말은, 카메라가 시간에 의존하여 몸을 기록할 때, 그 안에 담겨지는 자아와 화면 위에서 발생되는 이미지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을 뜻한다(심지어 몸은 매개된 후 사라진다). 비디오에 대해서 물리적인 매체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그것의 진정한 매체적 특성은 심리적인 상황(나르시시즘)에 있다고 주장하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통찰은 바로 이 틈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근거로 하는 것일 테다.[6]
그러나 나는 여기서 비디오의 매체적 특성보다는 몸이 영상에 의해 매개되어 이미지로 발생하면서 나타나는 자기반영적 왜곡이 나우먼의 작업에서 어떻게 강화되어 드러나는지를 강조하고 싶다.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라는 말이 일상적인 영역에서 소통되는 수준의 문장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카메라 앞의 나우먼의 몸은 (거의 고유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매우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7] 만약 나우먼이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라는 문장에서 통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이행했다면 그것은 단지 당시 예술의 영역에서 의미 있게 탐구되던 한 경향인 ‘일상(everydayness)’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이것이 사진으로 기록되었다면, 그의 움직임이 언어적인 명령을 얼마만큼 비껴가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8] 확인할 수 있는 이 격차를 통해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라는 명령은 무한한 움직임의 가짓수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 화면에 비친 나우먼의 몸은 그 중 하나의 가능한(고유한) 경우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매개된) 몸의 움직임은 (사전적으로)텍스트-(사후적으로)영상을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재현의 체계(언어적 기호와 이미지)에 이중으로 구속된 상태에 놓여 있다. 기호의 증명임과 동시에 기호로부터의 탈주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우먼의 행위-영상은 몸으로 매개되는(몸이 매개하는) 재현 체계의 불안함을 전면화한다. 안무된 몸은 스스로를 기호화 하지만, 자기 자신이기도 한 형상의 동시적인 드러남으로 인해 전적으로 기호적인 것으로서 통약될 수 없는 격차를 껴안고 있다. 즉 화면에 드러난 몸의 움직임은 그것에 겹쳐진 재현 체계들 사이의 오차를 스스로 명백히 드러내는 것으로 기능함으로써 지표관계의 혼란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 혼란이란, 실상 미미할 오차의 간극 사이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유령처럼 배회하는, 무한히 진동하는 (실패한 의미 교통의 흔적으로서의) 피드백과 같다.
화면 안의 움직임을 본다는 것은 그 진동의 주파수와 공명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한 지각의 결과로서 영원히 봉합될 수 없는 분열증의 미학이 관객의 자리에서 생성된다. 나우먼의 작업에 대한 레페키의 감상 중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은 안무적인 것이 ‘언캐니’하다는 표현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언캐니는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거나 한때는 익숙했던 것으로 데려가는 무서움의 한 종류”이다. 즉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혹은 (마주치면 죽어버린다고 전해지는 도플갱어처럼)이 세계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환기시키는 공포이다. 이 즉각적인 두려움은 형상의 현현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화면 안에서 안무하는 나우먼의 몸은 그 고유한 움직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붙잡아 두면서도 동시에 그 형상의 윤곽에는 동질적이지는 않지만 동형적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관객은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너머’의 세계, 이면의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너머의 세계란 다른 어떤 이상적인 시공간이나 변증법을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가시적인 세계와 겹쳐지거나 맞물리지 못하는 불화의 상태 그 자체다. 불화는 합리적 세계가 감춘 허구를 작동시킨다. 그리하여 나우먼의 매개된 몸은, 특히 그것이 안무된 몸이라는 점에서 심리적 불안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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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섬세한 예술적 실험이 오늘날에는 불가능하거나 그 급진성을 획득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이를 몇몇의 징후적인 것으로부터 읽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오늘날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입장을 제안하는 제도적 주체인 미술관에서 몸을 다루는 방식이다. 미술관이 퍼포먼스 작업을 소장하거나 아카이브하는 것은 대체로 영상이나 사진 등 ‘굴절된 것’의 표면을 통해서이다. 이를 통해 전반적인 재현의 체계 안에서 불화의 미학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진정한 몸의 기능은 소외되고, 시각적인 인식으로 서술되는 편편한 역사를 구축한다. 여기서 몸은 단지 있었음을 위한 증거로만 소요될 뿐이며, 허구의 틈을 메워버리는 교육적인 언어로 환원된다. 혹은 몸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오로지 현재의 동물화된 ‘감각’만을 강렬하게 자극할 뿐이다. 이 양극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일 것이다.
몸이 굴절되어 드러난다는 것은 보다 광범위한 재현의 미디어 환경에서 일상적으로 감지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제 몸은 굴절되는 것을 넘어 ‘완전히’ 매개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흡수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몸의 매개가 제안하는 시차적 감각을 예민하게 주시하기 보다는 몸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특정한 기표로 전환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게 만드는 미디어 환경 속에 있다. 인스타그램의 피드에는 카메라 앞에 서서 스스로의 과장된 행위를 통해 신체를 적극적으로 기호화 시키는 이미지가 얼마나 많으며, 가짜 뉴스는 얼마나 강한 힘으로 사실을 대체하는가. 그 이미지들은 매개된 몸의 굴절을 보여주는 심리적 장치가 아니라 가상의 화폐처럼 투명하게, 오로지 교환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완전히 추상화된 몸을 끊임없이 현재화할 뿐이다. 비토 아콘치카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이미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중적인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시를 강박적으로 시도했다면, 이제는 누구도 굴절된 몸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다 더 정밀한 아바타를 재현된 공간에 투사하거나 VR이 인도하는, 몸이 거세된 완전한 가상의 차원으로 몰입하며 유토피아적인 상상에 사로잡힌다. 시차적으로 도달해야 할 몸은 납치당했고 영원히 이곳을 거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몸을 매개시킨다는 것, 그리하여 몸을 다시 쓰고 그것이 어떤 경로를 지나가는가를 본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것은 현재를 가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몸과 몸의 움직임을 굴절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긴급한 요청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금 여기의 조건에서 그것을 급진적이게 만드는 방법론(혹은 매체를) 발명하는 일이다.
주
[1] Jonah Westerman, “Between Action and Image: Performance as ‘Inframedium’”
http://www.tate.org.uk/context-comment/articles/between-action-and-image-performance
[2] Andre Lepecki, Exhausting Dance: Performance and the Politics of Movement, p.23.
[3] 브루스 나우먼의 작업을 ‘언어’라는 측면으로 경유하여 독해하려는 시도는 자넷 크레이나크에 의해 먼저 성취되었다. 크레이나크에 따르면, 저드슨 댄스 시어터로 대표되는 1960년대 무용계는 행위 하는 몸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졌으며 그 행위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지시문, 안무, 기록 등을 퍼포먼스 이벤트 안으로 끌고 들어왔는데, 나우먼의 안무는 그 새로운 경향에 빚지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레이나크는 나우먼의 스튜디오 필름이 몸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위하게 만든 지시문을 암암리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안무는 ‘움직임의 언어’라고 이해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Janet Kraynak, Please Pay Attention Please: Bruce Nauman’s Words, Cambrideg: The MIT Press, 2003, pp.16~17.
[4]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는 안무가 움직임의 ‘언어’가 아닌 움직임의 ‘글쓰기’로 명명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레페키의 주장은 타당하다.
[5] 오스틴 (J.L. Austin)은 언어행위를 진위문(constative)과 수행문(performative)으로 나누고, 언어가 근본적으로는 진술이나 진위 판별보다는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전개한다. 여기서 수행적 언어는 발화를 통해 대상의 상태를 변하게 만드는 것을 이른다. 예를 선서나 설득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수행성이란 행위 그 자체보다는 상태의 변화에 대한 암시를 강하게 내포한다. J.L 오스틴, 『말과 행위』, 김영진 역, 서울: 서광사, 1992, 22~33쪽.
[6] Rosalind Krauss,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October, Vol. 1(Spring, 1976), pp. 50~64.
[7]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를 보면, 나우먼은 제목이 뜻하는 바대로 흰색 선으로 표시된 정사각형 위를 걷는다. 그가 걷는 모양새는 퍽이나 기이한데, 발을 내딛은 후 그 편의 골반을 과도할 정도로 치켜 올리며 몸을 굴곡지게 만든다. 이어지는 다음 걸음에서는 옮겨진 발의 뒤꿈치를 이전 발의 발끝에 맞춰 두며 아주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이런 방식으로 사각형을 한 바퀴를 돈 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뒤로 한 바퀴를 돈다. 뒷걸음으로 처음의 자리에 돌아왔을 때, 몸을 반대 방향으로 튼 뒤 똑같은 절차를 이행한다.
[8] 사진이 안무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옥토버』 89호(1999년 여름)에 게재된 이본 라이너의 <트리오 A>(1966)에 관한 캐리 램버트-베티의 연구 「Moving Still: Mediating Yvonne Rainer's "Trio A"」이다. 그러나 램버트-베티가 <트리오 A>를 사진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중요한 이유 또한 기호적인, 움직임 없는(motionless) 안무에 있다는 것은 당시 등장한 안무의 실험적 경향과 재현 매체와의 관계에 대한 꼼꼼한 이해를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