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위한 제언 Proposal for a Tussle (2007)
장-피에르 고랭
불안
“개미의 길 : 영화에 있어서의 에세이, 1909~2004”라는 제목 하에 57편의 영화를 모아 놓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논쟁의 불씨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 글은 2007년에 비엔나영화제와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이 장-피에르 고랭을 객원 큐레이터로 초청하여 마련한 에세이영화 특별전의 서문이다. ☞ 상영작품 목록 보기] 이 리스트는 십중팔구 사람들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만들 것이며 매 상영 시마다 해당 영화가 이 리스트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들이 나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영화의 선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거나 조롱 내지는 심지어 야유가 쏟아질 수도 있으며 십 수 편의 다른 영화들이 부당하게 누락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조망이란 우연적이고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는 학술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취향에 기인한 것이다. 확실히 야유하는 이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특별전의 관객들을 줄곧 따라다닐 논쟁은 에세이 그 자체의 개념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에세이스트 엘리자베스 하드윅이 지적했듯, 에세이란 용어에는 “엄밀함이라는 평온”(serenity of precision)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문학에 있어서의 에세이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를 소설이나 시와 같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식을 지닌 장르와 대비시키고 있다. 영화적 에세이에 대해 다루고자 할 때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픽션이 무엇이며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분법 속에서 관객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영화사(史)의 박물관 속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 간의 대립만큼이나 낡아빠진 것이다. 에세이의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그러한 이분법의 확실성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이는 그 분리의 양 측면을 동시에 수용하는 형식이며, 다큐멘터리에서 픽션으로 혹은 그 반대로의 이행이 가능한 형식으로,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픽션 대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른 대립을 만들어낸다.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영화계에서는, 이처럼 장르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표현의 개별성과 자유로운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는 문학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혹한 대접을 받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실 영화적 에세이와 문학적 에세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다시 하드윅을 빌려 말하자면, “자유는 발휘되어 왔다. 하지만 그건 몇몇(관객들)에겐 거의 금기의 대상이었고, 때론 미처 발휘되기도 전에 경계를 넘다 포획되곤 했다.” 아무리 조심스러운 필름 에세이스트들이라 해도, 그들은 언제나 오만불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와 주장은 변덕스러울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스타일과 개인적 방식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이는 신성불가침의 상업적 고려를 전적으로 무시함으로써만 관객에게 제시될 수 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작업하며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픽션은 언제나 스튜디오적 이미지를 불러들이며 다큐멘터리는 제도적 맥락 내에서 자라난다. 그것들은 모두 틀과 방법들,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구속들에 대해 말한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 있어서의 에세이 또한 “클로즈드 숍”(하드윅) - [주] 노조원만을 고용하고 비노조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사업장 - 이 아니다. 이러한 영화를 구상하고, 그것의 역사를 개괄하며, 그 가운데 독특한 작품들의 목록을 만들려 시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어쩌면 야유하는 이들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블랙 홀
문학이라고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 집착함으로써 클로즈드 숍이라는 미로를 빠져 나가길 바라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문학적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적 에세이는 주제(subject matter)란 주체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 to the subject)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에세이의 핵심에는 그것을 쓰거나 영화적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이에게 중요한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는데, 이러한 관심은 그것[관심사]을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명명할 - 말하자면, 그것[관심사]를 논리 정연한 방식으로 영화화할 - 수 있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에세이의 핵심에는 무언가 강렬한 것이 있어서 이는 그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around) 말하게끔 실존적 요구를 자극한다. 이러한 블랙홀이 없이는 에세이스트의 걸음걸이란 (그리고 에세이스트의 목소리에 우선하고 이를 조건 짓는 걸음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에세이의 기이한 패러독스가 있다. 결국 우리는 에세이의 수행을 자극한 것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가 거기서 점점 일탈해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에세이를 독자 혹은 관객과 결합시키는 기이한 전환이 있다.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든 혹은 언어, 이미지, 사운드, 음악을 통해서든) 그것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이에게 그것이 강제하는 춤이다. 이 회고전에 포함된 57편 영화들[의 제작]을 자극한 것[동기, 주제]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채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들이 스스로의 전제 주변에서 춤출 때 보여주는 부단한 운동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에세이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열어주고 우리 자신이 되게끔 하는 충동의 형식으로서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다시 한 번 문학적 에세이에 대한 하드윅의 말을 인용하자면, “에세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평등이 존재하는 공중에 의해 소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라는 말을 “관객”으로 바꾸어도 이러한 원리는 변함없다.
끊어진 아드아드네의 실타래
하지만 독자는 [에세이를 읽는 데 요구되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만 관객은 그렇지 못하다. [문학적 에세이의 경우] 매 페이지마다에서 논의는 언제나 중단되고, 거듭 읽혀지며, 음미되고, 회고되고, 새롭게 이해될 것을 요청한다. 소설 심지어 시보다도 더, 문학적 에세이는 2차, 3차, n차 독해를 요청하지 않는 독서란 진정한 독서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구문 중간에 종종 독서를 멈추고 그간 밟아온 과정을 화고해 봄이 없이 몽테뉴[의 <수상록>]의 단 한 페이지라도 읽어나갈 수 있겠는가? 그의 글쓰기를 성찬(聖餐)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더듬거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그를 든든한 후원자로 삼되 결코 그에게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몽테뉴란 이름을 당신의 취향에 따라 에머슨, 해즐릿, 키에르케고르, 니체 혹은 릴케의 이름으로 바꿔본다 해도 결과는 동일할 것이다. 그들의 글을 단숨에 읽은 척하는 이는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그들을 알렉상드르 뒤마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전적으로 다른 생리를 따른다. 그것들이 상영되는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그 흐름을 돌이켜보는 일은 고사하고 거기에 개입할 수조차 없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에 가차 없이 녹아드는 이미지들은 출현하는 즉시 사라지며,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흐름에 언제나 잘 어울리는 것은 픽션이다. 픽션의 인물들은 그 일시성 속에서 잘 살아간다. 반대로 에세이 영화들은 언제나 그들 각자와의 전투를 치른다. 한 편의 에세이 영화 속에서 이미지의 지위 그리고 음성, 소음, 음악과 같은 사운드의 지위는 동일한 요소들이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차지하는 지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문제되는 것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시되는 것의 순서가 아무리 혼란스럽다 해도) 픽션의 시간적 배열과 (묘사된 리얼리티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다큐멘터리의 사실적 설명에는 선형성이 존재하며, 이는 영화 이미지와 그 흐름의 본질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에세이는 이러한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그 방향을 돌리고 그 흐름 자체 위로 흘러넘치게 하는 작업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 편의 에세이 영화 속에서 이미지는 결코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스스로에게 다시 돌아오고 그 자신의 시간성과 일회성을 거부한다. 이러한 저항은 순수한 반복 내지는 사운드를 통한 재(再)프레임화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한 편의 위대한 에세이 영화의 성공은 시간에 저항하고 그것을 지연시키는 천한 가지 방식에 달려 있다. 세헤라자드는 영화 에세이스트들이 지은 궁전에 거주한다.
세헤라자드, 엔지니어
따라서 에세이 영화는 유희적일 수밖에 없다. 지연에 대한 요구는 에세이 영화들을 끊임없이 그 바깥으로 밀어낸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영화는,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집중과 일관성을 꿈꾼다. 그것들이 전개되는 공간은 언제나 농밀하다. 그것들은 고착적이며 그로 인해 상찬된다. 영화 에세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들은 유목적이며 종종 그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영화 에세이에 있어서는 산종(dissemination)이야말로 규칙이며 언제나 열려 있는 연상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이상이 된다. 영화 에세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억압시킨 것 위에서 노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규칙으로 운용되는 게임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발명해내는 일이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에세이 영화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독특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것, 목적에 복무하게끔 구성되어 있는 것들을 인용하고, 표절하고, 강탈하며, 다시 정리하는 데서 전적인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재차 삼차 반복하는 데서 편안함을 느끼며 이로써 동일한 요소들이 새로운 배열 속에 놓이게 된다. 에세이는 탁월한 리좀적 형식이며 영원히 확장되고 발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자체의 활력이 소진되는 것 이외에는 중단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에세이는 니체적 의미에서의 반추(rumination)이자, 그것이 선택한 소재들로 향하는 출입구를 증식시키려 노력하는 지성의 굽이침이다. 그것은 잉여이자, 표류이며, 파열이고, 생략이자, 돌이킴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유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감정으로 전환되고 다시 사유로 돌아가는 사유다. 신기한 것은 그것이 장르들(다큐멘터리, 팸플릿, 픽션, 다이어리… 등등)과 시시덕거리긴 하지만 결코 어느 하나에 고착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미학의 영역을 넘보긴 하지만 역시 고착되진 않는다. 그것은 형식 및 내용 모두에 있어서 자유분방함 그 자체이며, “흰코끼리 예술”이 아니라 “흰개미 예술”이다. 물론 이는 마니 파버에게서 전면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파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가 단지 로렐과 하디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자. 왜냐하면 그의 말은 영화 에세이스트들에게 훨씬 더 잘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라는 허식을 향한 아무런 야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목적도 없이 하염없이 산재(散在)시키는 비버와 노력과 같은 작업에 몰두한다. (이들의) 예술을 묘사하는 가장 포괄적인 표현은 흰개미 같다(termite-like)는 것일 터이며, 이는 특수화라는 장벽을 뚫고 길을 내는 작업처럼 여겨지며, 예술가 자신이 그의 예술이 당면한 경계들을 폐지하면서 이러한 경계들을 이후의 성취를 위한 조건들로 바꿔버린다는 것 이외엔 아무런 대상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흰개미(들)
파버의 제언을 면밀히 살펴보자. 에세이 형식을 분석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나’(I)가 존재하지 않을 때 에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이는 증거에 입각한 것이지만 논의의 장을 망쳐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는 대명사에 수반되는 자전적인 것, 일기 같은 것, 고백적인 것들이 꼭 에세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나’의 발화를 통해 드러나는 페르소나에 에세이 영화를 결부시키는 것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끝없이 개량되는 유형학 속에서 논의의 장은 무너져버린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자. 이와 같은 ‘나’를 향한 기원(祈願)과 상찬에는 영화 에세이를 그것의 영예로운 문학적 친척과 분리시키길 원치 않는 무기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파버의 제언을 우리의 논의에 끌어들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그가 [에세이의] 방정식에서 ‘나’라는 항을 제거하고 대신 벌레의 본능적 에너지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본능적 에너지는 미학적 찬양을 불러일으킨다기보다는 가장 인접해 있는 해충 구제업자를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만일 에세이 영화가 결국 [‘나’와의] 볼썽사나운 관련으로부터 벗어나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 속에서 발화하는 것이 1인칭 단수대명사라는 사실, 특정한 유형의 페르소나가 담론의 흔적으로서 출현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영화들 속에서는 일종의 에너지가 프레이밍, 편집 및 믹싱 작업에 부단히 관여하고 그러한 작업을 재(再)정의하며 장르라고 하는 규정적 가정들로부터 영화를 벗어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에세이 영화가 존재한다면? 영화 에세이의 실험이 스스로를 세계와 맞서게끔 하는 한 영혼의 실험인 것은 부차적으로만 그러할 따름이며 이는 적응을 강요하는 규칙들의 체계에 맞서며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의 실험이 되기 위함이다. 무한한 영혼의 빛과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의기양양한 인간의 목소리”(수전 손택)의 예시가 아니라, 실천과 불확실함을 무릅쓰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필름메이커의 작업들을 통해 드러나는 영화의 이드(Id)를 수용하는 경험으로서의 영화 에세이.
이드
결국 우리는 영화 에세이란 하나의 영토가 아니며 영화가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대립물들의 픽션적이고 다큐멘터리적 형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르라기보다는 일종의 에너지.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의 환원이 불가능한 영화적 상태일 수도 있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당신은 D.W. 그리피스의 <밀 사재기>(1909)를 통해 영화의 기원에서도 에세이[적 형식]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지만, 몇 년 후 그리피스는 영화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담아내는 작업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을 애석해하게 된다. 20년 후,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지나, 당신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에서 에세이의 승리를 본다. 하지만 몇 차례의 시도 이후, <열정 :돈바스 심포니>(1931)와 <레닌에 관한 세 개의 노래>(1931)에서는 스탈린주의가 그의 목을 죄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상업영화의 압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에세이는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너무 일찍, 너무 늦게>(1981),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1983) 혹은 장 뤽 고다르의 <말의 힘>(1988) 같은 영화로 몸을 숨긴 채 다시 등장한다. 혹시 이것이 극도로 서구적인 양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 순간,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1977), 키들랏 타히믹의 <향기어린 악몽>(1977) 혹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2000) 같은 영화들과 더불어 아시아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멈추고자 하면 또 중동과 남미로….
물론 이는 성급하게 말해본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남는다. 상황이 아무리 불길하다 해도, 에세이적 에너지는 가장자리에, 영화를 사로잡고 있는 ‘이드’ 속에 생생히 살아 넘치고 있다. 시대가 억압적이고 지배적 미학이 길의 정면을 가로막고 있을수록 그것은 더욱 활력적으로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런 때일수록 에세이에 대해 말하기엔 적기라는 것이다. […]
“개미의 길 : 영화에 있어서의 에세이, 1909~2004”라는 제목 하에 57편의 영화를 모아 놓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논쟁의 불씨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 글은 2007년에 비엔나영화제와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이 장-피에르 고랭을 객원 큐레이터로 초청하여 마련한 에세이영화 특별전의 서문이다. ☞ 상영작품 목록 보기] 이 리스트는 십중팔구 사람들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만들 것이며 매 상영 시마다 해당 영화가 이 리스트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들이 나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영화의 선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거나 조롱 내지는 심지어 야유가 쏟아질 수도 있으며 십 수 편의 다른 영화들이 부당하게 누락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조망이란 우연적이고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는 학술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취향에 기인한 것이다. 확실히 야유하는 이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특별전의 관객들을 줄곧 따라다닐 논쟁은 에세이 그 자체의 개념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에세이스트 엘리자베스 하드윅이 지적했듯, 에세이란 용어에는 “엄밀함이라는 평온”(serenity of precision)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문학에 있어서의 에세이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를 소설이나 시와 같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식을 지닌 장르와 대비시키고 있다. 영화적 에세이에 대해 다루고자 할 때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픽션이 무엇이며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분법 속에서 관객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영화사(史)의 박물관 속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 간의 대립만큼이나 낡아빠진 것이다. 에세이의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그러한 이분법의 확실성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이는 그 분리의 양 측면을 동시에 수용하는 형식이며, 다큐멘터리에서 픽션으로 혹은 그 반대로의 이행이 가능한 형식으로,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픽션 대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른 대립을 만들어낸다.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영화계에서는, 이처럼 장르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표현의 개별성과 자유로운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는 문학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혹한 대접을 받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실 영화적 에세이와 문학적 에세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다시 하드윅을 빌려 말하자면, “자유는 발휘되어 왔다. 하지만 그건 몇몇(관객들)에겐 거의 금기의 대상이었고, 때론 미처 발휘되기도 전에 경계를 넘다 포획되곤 했다.” 아무리 조심스러운 필름 에세이스트들이라 해도, 그들은 언제나 오만불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와 주장은 변덕스러울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스타일과 개인적 방식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이는 신성불가침의 상업적 고려를 전적으로 무시함으로써만 관객에게 제시될 수 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작업하며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픽션은 언제나 스튜디오적 이미지를 불러들이며 다큐멘터리는 제도적 맥락 내에서 자라난다. 그것들은 모두 틀과 방법들,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구속들에 대해 말한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 있어서의 에세이 또한 “클로즈드 숍”(하드윅) - [주] 노조원만을 고용하고 비노조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사업장 - 이 아니다. 이러한 영화를 구상하고, 그것의 역사를 개괄하며, 그 가운데 독특한 작품들의 목록을 만들려 시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어쩌면 야유하는 이들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블랙 홀
문학이라고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 집착함으로써 클로즈드 숍이라는 미로를 빠져 나가길 바라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문학적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적 에세이는 주제(subject matter)란 주체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 to the subject)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에세이의 핵심에는 그것을 쓰거나 영화적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이에게 중요한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는데, 이러한 관심은 그것[관심사]을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명명할 - 말하자면, 그것[관심사]를 논리 정연한 방식으로 영화화할 - 수 있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에세이의 핵심에는 무언가 강렬한 것이 있어서 이는 그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around) 말하게끔 실존적 요구를 자극한다. 이러한 블랙홀이 없이는 에세이스트의 걸음걸이란 (그리고 에세이스트의 목소리에 우선하고 이를 조건 짓는 걸음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에세이의 기이한 패러독스가 있다. 결국 우리는 에세이의 수행을 자극한 것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가 거기서 점점 일탈해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에세이를 독자 혹은 관객과 결합시키는 기이한 전환이 있다.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든 혹은 언어, 이미지, 사운드, 음악을 통해서든) 그것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이에게 그것이 강제하는 춤이다. 이 회고전에 포함된 57편 영화들[의 제작]을 자극한 것[동기, 주제]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채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들이 스스로의 전제 주변에서 춤출 때 보여주는 부단한 운동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에세이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열어주고 우리 자신이 되게끔 하는 충동의 형식으로서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다시 한 번 문학적 에세이에 대한 하드윅의 말을 인용하자면, “에세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평등이 존재하는 공중에 의해 소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라는 말을 “관객”으로 바꾸어도 이러한 원리는 변함없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 (지가 베르토프, 1929)
끊어진 아드아드네의 실타래
하지만 독자는 [에세이를 읽는 데 요구되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만 관객은 그렇지 못하다. [문학적 에세이의 경우] 매 페이지마다에서 논의는 언제나 중단되고, 거듭 읽혀지며, 음미되고, 회고되고, 새롭게 이해될 것을 요청한다. 소설 심지어 시보다도 더, 문학적 에세이는 2차, 3차, n차 독해를 요청하지 않는 독서란 진정한 독서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구문 중간에 종종 독서를 멈추고 그간 밟아온 과정을 화고해 봄이 없이 몽테뉴[의 <수상록>]의 단 한 페이지라도 읽어나갈 수 있겠는가? 그의 글쓰기를 성찬(聖餐)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더듬거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그를 든든한 후원자로 삼되 결코 그에게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몽테뉴란 이름을 당신의 취향에 따라 에머슨, 해즐릿, 키에르케고르, 니체 혹은 릴케의 이름으로 바꿔본다 해도 결과는 동일할 것이다. 그들의 글을 단숨에 읽은 척하는 이는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그들을 알렉상드르 뒤마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전적으로 다른 생리를 따른다. 그것들이 상영되는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그 흐름을 돌이켜보는 일은 고사하고 거기에 개입할 수조차 없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에 가차 없이 녹아드는 이미지들은 출현하는 즉시 사라지며,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흐름에 언제나 잘 어울리는 것은 픽션이다. 픽션의 인물들은 그 일시성 속에서 잘 살아간다. 반대로 에세이 영화들은 언제나 그들 각자와의 전투를 치른다. 한 편의 에세이 영화 속에서 이미지의 지위 그리고 음성, 소음, 음악과 같은 사운드의 지위는 동일한 요소들이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차지하는 지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문제되는 것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시되는 것의 순서가 아무리 혼란스럽다 해도) 픽션의 시간적 배열과 (묘사된 리얼리티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다큐멘터리의 사실적 설명에는 선형성이 존재하며, 이는 영화 이미지와 그 흐름의 본질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에세이는 이러한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그 방향을 돌리고 그 흐름 자체 위로 흘러넘치게 하는 작업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 편의 에세이 영화 속에서 이미지는 결코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스스로에게 다시 돌아오고 그 자신의 시간성과 일회성을 거부한다. 이러한 저항은 순수한 반복 내지는 사운드를 통한 재(再)프레임화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한 편의 위대한 에세이 영화의 성공은 시간에 저항하고 그것을 지연시키는 천한 가지 방식에 달려 있다. 세헤라자드는 영화 에세이스트들이 지은 궁전에 거주한다.
세헤라자드, 엔지니어
따라서 에세이 영화는 유희적일 수밖에 없다. 지연에 대한 요구는 에세이 영화들을 끊임없이 그 바깥으로 밀어낸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영화는,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집중과 일관성을 꿈꾼다. 그것들이 전개되는 공간은 언제나 농밀하다. 그것들은 고착적이며 그로 인해 상찬된다. 영화 에세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들은 유목적이며 종종 그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영화 에세이에 있어서는 산종(dissemination)이야말로 규칙이며 언제나 열려 있는 연상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이상이 된다. 영화 에세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억압시킨 것 위에서 노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규칙으로 운용되는 게임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발명해내는 일이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에세이 영화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독특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것, 목적에 복무하게끔 구성되어 있는 것들을 인용하고, 표절하고, 강탈하며, 다시 정리하는 데서 전적인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재차 삼차 반복하는 데서 편안함을 느끼며 이로써 동일한 요소들이 새로운 배열 속에 놓이게 된다. 에세이는 탁월한 리좀적 형식이며 영원히 확장되고 발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자체의 활력이 소진되는 것 이외에는 중단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에세이는 니체적 의미에서의 반추(rumination)이자, 그것이 선택한 소재들로 향하는 출입구를 증식시키려 노력하는 지성의 굽이침이다. 그것은 잉여이자, 표류이며, 파열이고, 생략이자, 돌이킴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유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감정으로 전환되고 다시 사유로 돌아가는 사유다. 신기한 것은 그것이 장르들(다큐멘터리, 팸플릿, 픽션, 다이어리… 등등)과 시시덕거리긴 하지만 결코 어느 하나에 고착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미학의 영역을 넘보긴 하지만 역시 고착되진 않는다. 그것은 형식 및 내용 모두에 있어서 자유분방함 그 자체이며, “흰코끼리 예술”이 아니라 “흰개미 예술”이다. 물론 이는 마니 파버에게서 전면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파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가 단지 로렐과 하디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자. 왜냐하면 그의 말은 영화 에세이스트들에게 훨씬 더 잘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라는 허식을 향한 아무런 야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목적도 없이 하염없이 산재(散在)시키는 비버와 노력과 같은 작업에 몰두한다. (이들의) 예술을 묘사하는 가장 포괄적인 표현은 흰개미 같다(termite-like)는 것일 터이며, 이는 특수화라는 장벽을 뚫고 길을 내는 작업처럼 여겨지며, 예술가 자신이 그의 예술이 당면한 경계들을 폐지하면서 이러한 경계들을 이후의 성취를 위한 조건들로 바꿔버린다는 것 이외엔 아무런 대상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흰개미(들)
파버의 제언을 면밀히 살펴보자. 에세이 형식을 분석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나’(I)가 존재하지 않을 때 에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이는 증거에 입각한 것이지만 논의의 장을 망쳐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는 대명사에 수반되는 자전적인 것, 일기 같은 것, 고백적인 것들이 꼭 에세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나’의 발화를 통해 드러나는 페르소나에 에세이 영화를 결부시키는 것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끝없이 개량되는 유형학 속에서 논의의 장은 무너져버린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자. 이와 같은 ‘나’를 향한 기원(祈願)과 상찬에는 영화 에세이를 그것의 영예로운 문학적 친척과 분리시키길 원치 않는 무기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파버의 제언을 우리의 논의에 끌어들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그가 [에세이의] 방정식에서 ‘나’라는 항을 제거하고 대신 벌레의 본능적 에너지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본능적 에너지는 미학적 찬양을 불러일으킨다기보다는 가장 인접해 있는 해충 구제업자를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만일 에세이 영화가 결국 [‘나’와의] 볼썽사나운 관련으로부터 벗어나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 속에서 발화하는 것이 1인칭 단수대명사라는 사실, 특정한 유형의 페르소나가 담론의 흔적으로서 출현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영화들 속에서는 일종의 에너지가 프레이밍, 편집 및 믹싱 작업에 부단히 관여하고 그러한 작업을 재(再)정의하며 장르라고 하는 규정적 가정들로부터 영화를 벗어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에세이 영화가 존재한다면? 영화 에세이의 실험이 스스로를 세계와 맞서게끔 하는 한 영혼의 실험인 것은 부차적으로만 그러할 따름이며 이는 적응을 강요하는 규칙들의 체계에 맞서며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의 실험이 되기 위함이다. 무한한 영혼의 빛과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의기양양한 인간의 목소리”(수전 손택)의 예시가 아니라, 실천과 불확실함을 무릅쓰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필름메이커의 작업들을 통해 드러나는 영화의 이드(Id)를 수용하는 경험으로서의 영화 에세이.
<향기어린 악몽> (키들랏 타히믹, 1977)
이드
결국 우리는 영화 에세이란 하나의 영토가 아니며 영화가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대립물들의 픽션적이고 다큐멘터리적 형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르라기보다는 일종의 에너지.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의 환원이 불가능한 영화적 상태일 수도 있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당신은 D.W. 그리피스의 <밀 사재기>(1909)를 통해 영화의 기원에서도 에세이[적 형식]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지만, 몇 년 후 그리피스는 영화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담아내는 작업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을 애석해하게 된다. 20년 후,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지나, 당신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에서 에세이의 승리를 본다. 하지만 몇 차례의 시도 이후, <열정 :돈바스 심포니>(1931)와 <레닌에 관한 세 개의 노래>(1931)에서는 스탈린주의가 그의 목을 죄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상업영화의 압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에세이는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너무 일찍, 너무 늦게>(1981),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1983) 혹은 장 뤽 고다르의 <말의 힘>(1988) 같은 영화로 몸을 숨긴 채 다시 등장한다. 혹시 이것이 극도로 서구적인 양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 순간,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1977), 키들랏 타히믹의 <향기어린 악몽>(1977) 혹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2000) 같은 영화들과 더불어 아시아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멈추고자 하면 또 중동과 남미로….
물론 이는 성급하게 말해본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남는다. 상황이 아무리 불길하다 해도, 에세이적 에너지는 가장자리에, 영화를 사로잡고 있는 ‘이드’ 속에 생생히 살아 넘치고 있다. 시대가 억압적이고 지배적 미학이 길의 정면을 가로막고 있을수록 그것은 더욱 활력적으로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런 때일수록 에세이에 대해 말하기엔 적기라는 것이다. […]
장-피에르 고랭
캘리포니아 샌 디에고에서
2007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