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마>(임철민, 2013)

WORK

<프리즈마>(임철민, 2013)



임철민 감독의 <프리즈마>는 2013년 인디포럼에서 첫 공개된 이후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DMZ국제다큐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발 등에서 상영되었다. 감독의 동의를 얻어 영상 전편을 소개한다. 변성찬, 이도훈 두 평론가의 글을 필자들의 동의를 얻어 함께 올렸다. 





________________critic's review ①_________________
"타자-우연 수용의 미학" _ 변성찬 영화평론가


임철민은 이제까지 세 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에게는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또는 공개될 기회를 얻지 못한 영화들이 있다.) <시크릿 가든 Secret Garden>(2010), <골든 라이트 Golden Light>(2011), <프리즈마 Prisma>(2013)가 그것이다. 각각의 작품도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세 편의 작품을 만들면서 임철민이 거쳐 온 영화적 궤적이다. 완전한 ‘1인 제작 영화’이자 임철민 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할 수 있는 <시크릿 가든>에서 시작된 그 여정은, 여전히 그 연장선에 있지만 부분적으로 ‘타자’를 수용하기 시작한 <골든 라이트>를 거친 후, <프리즈마>에서는 놀라운 ‘타자-우연 수용의 미학’에 도달하고 있다. ‘안으로의 운동’에서 ‘밖으로의 운동’으로의 이 방향 전환은, 임철민의 영화 만들기의 동기 및 계기가 실존적인 질문에서 좀 더 영화적인 질문으로 변화해 가는 궤적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임철민은 스스로 <프리즈마>를 ‘극, 실험, 다큐멘터리’라고 규정하고 있고, 영화는 그에 걸맞게 다양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그 모든 것이거나 그 모든 것이 아닌 임철민 영화의 실험성은, 실존적 질문에서 비롯된 ‘수행성’에서 영화적 질문을 품은 ‘자기-반영성/성찰성’으로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져 왔다.


<시크릿 가든>(2010, DV, 6분 22초)


<시크릿 가든>은 “이 영화는 내가 [군대] 복무 당시 썼던 일기들을 토대로 구성되어졌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감독 자신이 1인 5역(각본, 촬영, 편집, 음향, 연기)을 하고 있는 완벽한 1인 제작 영화인 <시크릿 가든>은, 그 제목처럼 시종일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안시환의 지적처럼, 이 영화는 단순히 군대에서 벌어지는 ‘누군가(또는 무엇인가)가 사라진 사건’에 대해 회고하는 영화가 아니라, 누군가(또는 무엇인가)가 ‘사라진 사건이 사라지는 이중의 사라짐’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질문하는 영화다. 그 질문은, 병사나 물품이 사라졌을 때 그 분실사고를 ‘없었던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정상을 가장하는 군대라는 조직을 향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크릿 가든>이 그 ‘이중의 사라짐’이라는 체제의 문제를, ‘나의 사라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의 토대가 된 그 일기들은 사실 일종의 ‘가짜 일기’였다고 한다. 감독은 주기적으로 병사들의 일기장을 확인하는 부대의 관행에 대한 저항으로 일기장에 종종 ‘진짜 같은 거짓말들’을 써놓았다. 전역 후 그것을 우연히 읽게 되었을 때, ‘써놓은 글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거짓인지’ 자신도 판단할 수 없게 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두 번째 체험이 이 영화의 진짜 출발점이 된 셈이고, 영화는 ‘조용히 사라져버린 그 때의 나’를 되찾기 위한 수행적인 시도가 된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사망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사라진 나(또는 어떤 순간의 정서적 진실)’를 되찾기 위한 수행적 몸짓, 이것은 그가 만든 세 편의 영화의 공통점(또는 일관성)이기도 하다.

<골든 라이트>는 전작인 <시크릿 가든>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음 작품인 <프리즈마>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하는 영화다. 즉, 두 영화 사이의 매개의 영화, 임철민의 영화적 궤적에서 나타나는 방향전환의 변곡점을 품고 있는 영화다. <시크릿 가든>과 마찬가지로 ‘사라진 나’를 되찾기 위한 수행적 계기에서 시작된 영화는, 어느 순간 <프리즈마>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타자-우연 수용의 미학’의 징후를 보여준다. 아니, 막연한 ‘징후’가 아니라, 명료한 깨달음이다. <골든 라이트>의 제작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어쨌든 이 영화가 처음부터 내 안에서 완결될 수 없는 불완전함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의미들이 자연스레 궁금해졌고, 그것 또한 완전할 수 없다는 것(불일치)을 알면서도 내면화를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서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털 사이트를 통해 ‘황금색 빛’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고, 검색된 한 블로그의 포스팅이 눈길을 끌었다. 황금색 빛을 통한 ‘사랑해’ 명상법이었다. 나는 마치 그 텍스트가 이 영상물의 매뉴얼이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내 안으로(혹은, 밖으로) 향하는 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덧붙였다.”


<골든 라이트>(2011, HD, 9분 11초)


<골든 라이트>는 어두운 방,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의 이미지를 보여준 뒤, 그 커튼을 향해 서서히 줌인하는 카메라의 운동을 느끼게 한 후, 극단적인 접사를 통해 드러나는 커튼의 미세한 결을 일종의 스크린으로 만든다. 그 이미지 위로 어느 날의 일기(랩 가사 스타일로 적은 일기)를 읽는 감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들려주던 영화는, 자신이 직접 수행했던 ‘최면 녹취 기록’을 따라 그 내면 여행의 시각적 재연으로 보이는 다양한 이미지들(만델브로의 프랙탈 그래픽을 연상시키는 애니메이션, 황금색 빛을 반사하고 있는 물결 이미지 등)을 몽타주하고 있다. 이 몽타주에는 방향 전환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몽타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질료들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파운드푸티지’들이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다가 우연히 얻은 영상’ 또는 다른 영화에 쓰려고 찍어두었던 ‘잉여영상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이미지 또는 텍스트 등). 다시 돌아온 커튼-스크린의 위로, 엔딩 타이틀이 뜬다. 이 커튼-스크린은 <프리즈마>에서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미지다. 단, 그것이 갖는 의미(또는 기능)에는 일종의 역전에 가까운 미묘한 변화가 있다. 극단적 접사로 인해 성긴 스크린이 된 <골든 라이트>의 커튼-스크린은 창밖의 빛을 안으로 투과시키는 장치로 기능하는 반면, <프리즈마>의 그것은 어떤 ‘영화’의 투영을 위한 영사막이 된다.

<골든 라이트>와 <프리즈마>는 일종의 ‘2부작’으로 보인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창문 밖에서 느꼈던 어떤 빛(‘골든 라이트’)의 체험이 두 영화의 공통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통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두 영화는, 흥미롭게도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골든 라이트>와 <프리즈마> 사이에, 그리고 <프리즈마>의 내부에, 두 가지 운동의 미묘한 긴장이 작동하고 있다. <골든 라이트>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았던 창밖의 ‘황금색 빛’의 체험을 내면의 여행으로 연장시키는 영화라면(밖에서 안으로의 운동), <프리즈마>는 창문 밖에서 시작된 내밀한 체험을 창문 안에서 한 편의 영화로 재구성한 후 결국 그것을 창문 밖으로 되돌리는 영화다(안에서 밖으로의 운동). 두 작품, 안과 밖, 과거와 미래, 영화와 현실 등의 대립 쌍들은 의미론적 상동관계를 이루면서 체계적으로 대립되고 있다. 그 대립 속의 긴장은, 결국 나와 세계의 관계, 또는 세계 안에서의 나의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질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프리즈마>가 보여주는 여정의 궤적이 흥미롭다. 밤의 실외(세계)에서 시작된 여정은 낮의 실내(나)에서 멈춘다(오프닝 시퀀스), 낮의 실내에서의 영화 만들기는, 어느 순간 일종의 준비 운동(또는 오랜 망설임)이기라도 하듯 방 안을 맴돌더니, 이내 창밖의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서 유영하듯 세상을 떠돈다. 어느 순간 타자의 세계(기억 또는 기록) 속을 오랜 동안 방랑하던 영화는, 그 모든 기억-이미지를 한데 뭉뚱그리더니, 그것을 방 안의 커튼-스크린에 투사한다. 타자의 기억을 빌려 나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이것이 <프리즈마>가 품고 있는 당황스럽고도 놀라운 역설이다. ‘사라진 나’를 되찾기 위해서는 기억을 되찾아야하지만, 그 기억은 타자(또는 세계)의 기억을 경유해서만 비로소 되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것, 아마도 이것이 <프리즈마>에서 나타나는 안에서 밖으로의 운동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타자-우연 수용이라는 방법론-미학 방향전환은 끝내 ‘버퍼링으로 망가진 사운드’나 ‘코덱 오류로 디코딩되지 못하고 암호화된 입자 덩어리’에 까지 이른다. 어쩌면 컴퓨터의 휴지통으로 보내진 후 결국 삭제되어야 할 운명이었던 존재들(‘디지털 쓰레기’)까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작품을, ‘시청각적-노이즈-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대)적 파운드푸티지’라고 부를 법한 다양한 질료들을 ‘수집’해서 ‘재구성’한 <프리즈마>는, ‘파운드푸티지’ 또는 ‘편집영화’(compilation film)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임철민의 세 편의 영화는 임철민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화적 수행이다. 임철민의 영화는 과거의 어떤 한 순간에 체험했던 인상과 감각을 되찾으려는 시도의 산물, 또는 그 시도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임철민은 ‘기억의 왜곡(또는 소멸)’을 ‘나의 사라짐’으로 받아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임철민 영화에서 사라진 나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어떤 ‘내러티브의 구성’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기 위해 (대개는 자기중심적이고 퇴행적인) 어떤 ‘내러티브’를 지어낸다. 그런데 임철민의 영화는 사라진 나를 되찾기 위해서 어떤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러티브로 환원되지 않는 그 무엇을 되찾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특히, <프리즈마>의 제작 과정은 이러한 ‘반-내러티브’적 분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임철민은 ‘내러티브-정체성(또는 사회적 정체성)’과 그것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의 감각’ 사이의 커다란 간극이 있음을 느끼고(또는, 인정하고), 그 간격(또는, 어떤 결핍과 결여)을 자기중심적이고 퇴행적인 판타지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격을 타자-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틈(일종의 ‘역량’)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임철민 작품의 실험성은 좁은 의미에서의 미학(또는, 형식주의적인 스타일-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진정으로 윤리적인 질문의 영화적 수행의 산물이다. 아마도 이것이 임철민의 세 편의 영화(특히, 그 영화적 실험의 도달점인 <프리즈마>)가 품고 있는 소중한 의미이자 의의일 것이다.

* (후기) 이 글은 임철민의 세 번째 영화 <프리즈마>가 공개된 2013년, 『씨네21의 ‘독립영화비행’ 코너에 기고했던 글과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주관하는 ‘독립영화쇼케이스’의 ‘임철민 감독전’을 위해 썼던 리뷰를 약간 수정하고 보충한 글이다. 따라서 임철민이 2016년에 세상에 내놓은 <빙빙>은 이 글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 <빙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적인 전시 형태를 실험하고 있는 프로젝트 그룹 파트타임스위트가 기획한 ‘멀티스크린 싱크로나이즈드 뮤직 비디오 상영회 XXX'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말하자면, <빙빙>은 임철민의 첫 주문생산 작품인 셈이고, 주어진 음악(사운드)에 맞추어 구성한 일종의 ’뮤직 비디오‘다. <시크릿 가든>에서 <프리즈마>까지의 임철민의 궤적을 ’안으로의 침잠에서 밖으로의 열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면, 그 열림 이후 처음으로 만든 (또는 공개한) 영화가 <빙빙>이라는 것은 나름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화가 품고 있는 정서의 핵심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지만, <프리즈마>를 통해 타자-우연 수용의 방법론-미학을 체화한 임철민은, 이 작품에서 주어진 사운드에 맞추어 좀 더 자유롭고 경쾌하게 유희하고 있다. 어쨌든 <빙빙>의 더 중요한 컨텍스트는 임철민이라기보다는 파트타임스위트의 'XXX' 프로젝트이고, 따라서 <빙빙>을 위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하다.


________________critic's review _________________
"임철민의 <프리즈마>" _ 이도훈 『오큘로』 편집진


삶과 영화가 투명하게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한 영화적 순간을 향한 열망이 근 몇 년 간 독립영화 진영에서 가장 순도 높은 형태로 완성된 작품은 임철민 감독의 <프리즈마>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일련의 실패들로부터 시작한다. 오프닝에서 추상회화 같은 영상이 흐르면 그 위로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뒤섞인다.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야심한 밤에 홈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찍은 이 영상은 애초 목표 범위 내에 없던 잉여였기 때문에 감독에게나 관객에게나 유령처럼 다가온다. 폐기될 운명을 타고 났던 영상들을 포용한 감독의 선택과 그러한 연출의 태도는 영화 전반에 걸쳐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무수히 반복되는 카메라 테스트, NG, 리허설 촬영 분을 활용한 장면들은 감독이 제작 과정에서의 실패, 오류, 그리고 우연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패와 오류마저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유연한 작업 방식은 시나리오와의 작별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안이 사라져가면서 달라진 건 제작환경만이 아니었다. 최초의 구상과 계획을 단념하는 순간 감독은 자신을 지우고, 자신과 관계된 모든 영화적 그리고 사회적 고리를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만들어지지 못한 미지의 그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처럼 바깥의 세계를 자의식 속으로 빨아들이는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하나의 영화가 사라지고 또 다른 영화가 나타났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프리즈마>는 소생 가능성이 희박했던 생명에 새 숨결을 불어 넣는 주술의 결과물과 같다. 


<프리즈마>(2013, HD, 61분 17초)


주목할 부분은 이미지들이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상시적으로 진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영화는 창작자를 중심에 둔 고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창작자가 그 스스로를 둘러싼 모든 사물, 대상, 사람, 환경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밖으로 팽창하는 개방적인 작품이다. 아홉 명의 지인들로부터 받은 핸드폰 영상은 감독을 매개로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를 매개로 그 성격이 고립에서 개방으로 바뀐다. 각각의 영상들은 감독의 지인들이 일상이나 여가를 보내면서 찍은 소소한 것들로 소셜네트워크에 무수히 올라오는 여느 영상들처럼 복제 가능하고, 확산 가능하며, 공유 가능한 재료들이다. 뉴 미디어 세계에서 이미지가 생산, 유통, 소비되는 일련의 정치경제학적 생산양식은 이 영화의 제작 방식에 있어서 모델 역할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 덕분에 관객들은 동시대의 사회적 삶의 흐름을 가시적으로 인식하고 또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때 감독은 지인들과의 친교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구심력을 자처하고 있으며, 영화라는 플랫폼은 그 각각의 영상들이 세상 밖으로 확장하는 과정 속에서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프리즈마>는 우정과 사랑을 중심에 둔 작은 집단이 무한하게 확장하면서 또 다른 세계로 변형되는 과정을 다루며, 더 나아가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영화 이미지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성찰을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작품은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순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영화라는 매체의 본원적 성격에 대해 묻는다. 앞서 무수한 실패와 오류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영화에 투자했고, 또 일상적으로 하찮게 여겨졌던 이미지를 재조립해 예기치 못한 결과물을 생산했다. 하지만 디지털 버그가 발생하면서 영화는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적용되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정언명령이란, 버그에는 리셋으로 대항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최초의 자리에서 영화 초반부의 그 방과 같으면서도 다른 방을 마주하게 된다. 침대가 있고 창문이 있는 그 방은 과거이면서도 현재이고 구체이면서도 추상이다. 또한 현실 공간의 재현이면서도 이미지와 정보의 흐름이 투사되는 스크린의 공간의 재연이다. 이처럼 결말에 이르러서 삶의 영역과 영화의 영역이 갈등이나 충돌이 아닌 조화와 타협 그리고 종합의 단계에 도달한다. 비로소 감독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질문을 끄집어내면서 이 영화의 끝나지 않는 유희를 관객에게 전달하고는 프레임 너머로 퇴장한다. <프리즈마>가 당신에게 묻는다. 영화란 무엇입니까?

※ 이 글은 인디포럼 20주년 자료집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프리즈마>는 2015년 인디포럼 20주년 특별전의 상영작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________________further reading_________________


홍철기, 「꿈처럼 흐르는 프리즈마: <프리즈마>(2013)의 임철민 감독 인터뷰」 ,  인문예술잡지 F』 제11호
※ 즉흥음악연주자 홍철기와 임철민 감독의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