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증거: 비치 파티 장르에 대하여

CRITIQUE

2020.9.8 OKULO online exclusive


여름의 증거
: 비치 파티 장르에 대하여

정경담


※ 이 글은 여기를 클릭해 음악을 재생해 둔 상태에서 읽기를 권합니다.


여기, 여름의 끈적함을 증빙하는 각종 멜로디들이 있다. 에어컨이 고장 난 자취방, 고향에서 가지고 올라온 덜덜거리는 신일 선풍기, 끈적거리는 노란 장판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듣는 비치 보이스. 옆구리에 수박 화채를 끼고 듣는 지미 클리프. 페이스북 라이브로 감상하는 SCR의 전자음악 믹스 라이브. 장마철 대청소를 마치고 제습기를 돌린 후 창가에 앉아 듣는 안드레아 파가니 트리오. 금지됐다고 생각하니 좋아하지도 않던 락 페스티벌도 그립다. 잔디밭, 쯔쯔가무시, 공짜 맥주, 수변 무대, 과도히 춤추는 사람들. 이제 그나마 집 밖에서 팬데믹 이전에 알던 여름의 분위기를 극대화시켜볼 수 있는 음악이란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에어팟으로 재생하는 1960년대 서프 락 컴필레이션 정도가 전부다. 서프 락의 ‘씰리’하고 ‘펑키’한 무드는 잠시나마 내가 KF-94 마스크를 쓰고 콧잔등에 땀을 흥건히 흘리면서 합정역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집회, 아니 모임 자체가 판타지가 됐다. 이제 비치 파티를 즐기는 자들은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파티의 주최자는 구속될지도 모른다. 

비치 보이스는 할아버지들이 되었고, 비틀즈 멤버의 반은 죽었다. 스티비 원더의 콘서트라니 당치도 않다. 자중치 못하고 떼창에 동참하다 서로의 비말을 공격적으로 나누고 자가격리 될 것이다. 락 페스티벌에는 정말로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요원해졌다. 나는 지금 비치 파티 장르의 음악적 유산들을 열거했다. 이상으로 굳이 이 장르를 길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치 파티 장르는 그냥 비치 파티에 관한 장르니까. 물과 모래사장이 등장하고, 스윙과 서프 락에 맞춰 구애의 춤을 추는 이들로 클럽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음악과 서핑과 코카콜라와 연애질에 함몰된 틴에이저들, 당연하게도 그들은 수영복 차림이고, 계절은 한여름이다. 에어컨도 없었을 1950~60년대의 뜨거운 여름. 그에 걸맞게 어리석은 판단만을 일삼는 이들의 주적은 어른들의 잔소리다. 그 밖의 어떤 것도 그들의 무대를 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바보 같아 보이지만 그 순간의 백치미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으며, 생각 없어 보이지만 진짜로 그들이 아무 생각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해변 밖에서 어떤 아이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삼삼오오 모여서 예쁘고 잘생긴 서버를 넋 놓고 바라보거나, 계속 춤을 춘다.

비치 파티 장르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백인 중심주의, 고정된 성 역할, 금발과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 중산층 헤테로의 유토피아. 이 장르는 그런 이유로 사장된 것이었을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성숙한 이유라면 좋겠지만, 그냥 십대가 동경하는 것들이 변했거나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해 보인다. 언젠가부터 틴에이저들을 사로잡는 것은 열정적이고 귀여운 사건들보다는 다소 퇴폐적이고 다크한 것들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해변에서 짝을 찾고 춤을 추는 건 더이상 틴에이저들을 매혹하기 힘들다. 동시대의 틴에이저들에게 그것이 더 이상 최대치의 비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 시간마다 아이스테이션 PMP로 친구들에게 공유받은 <가십 걸>과 <스킨스>를 보면서 매년 여름을 보냈다. <커피프린스 1호점> 만으로는 2퍼센트 부족했다. 지옥 같은 한국의 휴일 자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사교파티, 블랙베리 클래식, 마약, 친구 애인 뺏기로 가득 찬 판타지 시리즈물뿐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다른 장르의 변이 사이에서도 음악과 정서는 공유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계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여름을 증거하는 일에 살갗이 벗겨질 것 같은 따가운 햇볕과 습한 공기를 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뉴욕의 문화평론지 벌처(Vulture)에서 저스틴 겔트잘러는 비치 파티 장르가 범람하던 1960년대, 영화 속 순수한 틴에이저들의 비치 파티가 평화로웠던 백인들의 1950년대를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완전히 동의한다. 그럼 불안한 1960년대는 어디에 숨어있나? 아무리 노력해도 불안을 아예 숨길 수는 없다. 그것들은 그들의 파티를 끝내려는 세력들 속에 조용히 웅크려 있다. 공포의 시대 혹은 악의 축 자체를 빌런 캐릭터로 묘사하는 일은 반복된다. 냉전기 서구권의 호러 영화들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불안이 온갖 비정형적 몬스터로 드러났던 것처럼. 비치 파티 장르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1960년대가 완전히 펼쳐져서 다시 접을 수 없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즐거운 비치 파티를 끝내려는 어른들 정도의 캐릭터로 간단히 빌런을 설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빌런은 최소한 아주 나쁜 범죄 세력이나, 유령이나, 심지어는 몬스터가 되어야만 십대의 대중에게 소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초기 비치 파티 장르의 클래식으로 회자되는 7개 작품―<비치 파티>(1963), <비치 파티 2: 머슬 비치 파티>(1964), <비치 파티 3: 비키니 비치>(1964), <비치 파티 4: 파자마 파티>(1964), <비치 블랭킷 빙고>(1965), <하우 투 스터프 어 와일드 비키니>(1965), <고스트 인 더 인비저블 비키니>(1966)―들은 점점 더 심각하고 더 우울한 느낌의 새로운 빌런들을 데려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비치 파티 장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갔다. 


비치 파티 장르에 대한 비디오에세이 <The Beach Party Genre>

그러니까, 비치 파티 장르는 사장된 것이 아니라 점점 많은 것을 다루게 됐다. 비치 파티 장르는 사장된 척하지만 온갖 현대영화 속에, TV 광고와 잡지와 시트콤 속에 침범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청소년 문화의 변동에 따라 슬그머니 무대를 이동해왔을 뿐이지만, 장르의 명명을 그 무대에 귀속시켰기 때문에 사장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비치 파티 장르는 그 내러티브에서 탈각된 흥겨움 뿐만 아니라 틴에이저들에게는 영원히 근사할 모티브들, 이를테면 음담패설과 육체미와 파티 같은 것을 남긴다. 플롯 역시 지속된다. 

그럼, 이제 진정히 사라진 것도 아니라면서 굳이 비치 파티 장르의 원형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궁금해 해줬으면 좋겠다. 그건 비치 파티 장르가 여름과 젊음의 가장 표면적인 분위기만을 심플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비치 파티 영화들이 무척 재미있다는 이유도 없진 않다.) 이 글을 쓰던 중, 불과 엊그제 전국의 해수욕장이 긴급 폐장됐다. 이제 비치 파티 장르가 아니라 비치 파티를 포함한 모든 여름철 레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럼 영화는 사료가 될 것이다. 끝없이 과거의 향수를 소환하는 흐름 속에서 이 장르가 리바이벌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동시대를 말하는 영화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아마도 ‘냉전 없는 세상’이나 ‘평화로운 백인의 1950년대’ 같은 복잡한 범주보다는 ‘팬데믹 이전의 평화’와 ‘팬데믹 이후의 디스토피아’ 정도로 간략하게 시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VR을 통해 유령도시나 호그와트 속에 뛰어드는 것처럼, 겪을 수 없는 것을 겪거나,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을 다시금 소환하기 위해서 비치 파티 장르의 온화한 유산들을 요청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무리를 이렇게 지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카페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흐르는 물에 병적으로 손을 씻자. 기침을 할 때는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자. 그럼 언젠가는 사료 속에 갇힌 여름의 인파를 다시 되찾고, 새로운 여름의 풍경들을 영화 속에 기입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도 말이다.


Frankie & Annette MGM MOvie Legends Collection

(Beach Blanket Bingo / How to Stuff a Wild Bikini / Beach Party / Bikini Beach / Fireball 500 / Thunder Alley / Muscle Beach Party / Ski Party)  ※ <Beach Blanket Bingo>와 <How to Stuff a Wild Bikini>에는 노년의 버스터 키튼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