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 카즈히로의 관찰영화

CRITIQUE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
: 변화의 흐름에서 보존의 가치를 찾다

이도훈 (『오큘로』 편집위원)


소다 카즈히로 감독


※ 이 글은 제10회 대구사회복지영화제(2019.4.4.~4.10)에서 열린 소다 카즈히로 특별전의 부대행사로 진행된 시네토크를 위해 작성한 강연 노트를 수정한 것이다. 당시 대구사회복지영화제에서는 소다 카즈히로의 장편 <멘탈>(2008), <평화>(2010), <굴 공장>(2015), <항구 마을>(2018), 단편 <집>(2011)을 상영했고, 이 글은 그 작품들 중 장편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작성되었다. 소다 카즈히로의 작품의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하면서 그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준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측에 감사드린다. 소다 카즈히로의 작품 가운데 <멘탈>은 2010년에 국내 개봉되어 IPTV 및 온라인 다운로드 서비스를 통해 감상 가능하다.


관찰 영화 연작의 탄생


우리는 리얼리티의 생산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유물이라고 말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 쇼, 소셜 미디어의 이용자 생성 콘텐츠, CCTV를 비롯한 각종 감시 영상 등은 카메라의 기계적인 눈을 통해 인간의 개입 없이 현실을 자동적으로 기록한다. 누가 보지 않아도 기록이 되고 있으며, 누가 볼지 몰라도 전시가 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관찰을 통해 현장을 오랜 시간 동안 기록하여 카메라의 사회적 개입과 참여의 의의를 되묻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작업은 어딘지 모르게 진부하면서도 독특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편으로는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행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관찰자적 양식의 다큐멘터리를 추구하는 감독의 리스트를 꼽을 때 거기서 소다 카즈히로의 이름이 빠지면 섭섭할 것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일본 태생의 소다 카즈히로는 2007년에 제작한 자신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선거>를 시작으로 본인 스스로 관찰 영화(observational film)라고 부르는 형식의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가 말하는 관찰 영화는 특정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겸비한 작품을 뜻한다. 연출자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되고, 오로지 자신이 관찰하고 발견한 것에 의지해야한다. 그리하여 관객들이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소다 카즈히로가 주장하는 관찰 영화의 대략적인 정의로 그는 연출자의 눈이 바라본 세상이 관객의 눈에 투명하게 맺힐 때 한편의 작품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선거 Campaign>(2007)


소다 카즈히로는 관찰 영화를 위한 10가지의 지침을 만들었다. 그 세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사전 조사를 하지 말라, 대상을 미리 만나지 말라, 대본을 만들지 말라, 촬영은 직접 하라, 가능한 오랜 시간 동안 촬영하라, 작은 영역을 깊이 있게 다루어라, 편집하기 전에 주제를 구축하지 말라, 내레이션, 자막, 음악을 삽입하지 말라, 롱테이크를 활용하라, 제작비를 스스로 충당하라. 관찰 영화를 위한 이 십계명은 다큐멘터리스트로의 연출 방식과 태도를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상업적이거나 대중적이라고 말하는 다큐멘터리들에 대해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경계하고 저항하고 도전하겠다는 태도를 품고 있다.

실제로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그의 이력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970년 태생인 소다 카즈히로는 동경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이후 미국 뉴욕의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s)에 진학해 영화를 공부한다. 졸업 후 그는 NHK를 통해 방영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는데, 1997~2004년까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 40편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당시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항상 세부적인 사항까지 다 적혀 있는 대본이 있었고, 일정표에 따라서 촬영이 이루어지며, 미리 결정된 결말이 있었다. 그는 이 시절에 대해 부끄러움과 후회가 담긴 소회를 여러 인터뷰에서 남긴 바 있다. “다큐멘터리는 당신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포착하고 현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NHK와 작업하는 것은 정반대다. 당신은 의제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최초 계획에 맞도록 복사해서 붙여 넣기만 하면 되고, 당신만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배우는 건 없다. 나는 그런 작업이 정말 싫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소다 카즈히로의 반성은 그가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작품을 접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주지하다시피, 프레드릭 와이즈먼은 1960년대 경량화된 카메라와 동시녹음 장비가 등장하면서 출현한 미국 다이렉트 시네마의 전통을 지금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등장한 시네마 베리테와 함께 권위적인 해설과 연출자의 주관성을 배격하고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지향했던 미국 다이렉트 시네마는 공적으로 명성이 있는 정치인(<예비선거 Primary>(1960)의 경우 등)이나 뮤지션(<뒤돌아보지 마라 Don't Look Back>(1967)의 경우 등)의 삶을 자막, 해설, 내레이션 등이 없는 상태로 다루었다. 일부 평자들은 다이렉트 시네마의 형식과 그것이 지향했던 자유와 저항이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의 물결을 투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프레드릭 와이즈먼은 권력의 힘이 시스템 내부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고찰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 예술 등을 대표하는 다양한 기관들을 기록하면서 하나의 집단이 그 내부의 행위자들에 의해서 기능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다루었다. 기존의 다이렉트 시네마 감독들과 달리 유명인 대신 무명인을 주로 다루었다는 것은 프레드릭 와이즈먼이 거둔 소기의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소다 카즈히로가 프레드릭 와이즈먼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찰자적 양식이 정치적으로 평등한 시선을 겸비하면서 개개의 인간의 삶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소다 카즈히로의 작품은 일본 소시민들의 삶과 그들이 삶 속에서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그가 다루는 제재만 놓고 구분해보자면 그의 작품은 다음과 같이 분류 가능하다. 

(1) 정치적인 선거를 다룬 작품: <선거>(2007), <선거 2>(2013) 
(2) 공적 복지의 문제를 다룬 작품: <멘탈>(2008), <평화>(2010) 
(3) 예술적 실천을 다룬 작품: <연극 1&2>(2012) 
(4) 작은 시골 마을의 삶을 다룬 작품: <굴 공장>(2015), <항구 마을>(2018) 

그리고 전작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미국에 대해 다룬 최근작 <더 빅 하우스>(2018)가 있다. 이 작품들은 와이즈먼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하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개인이 맺는 다양한 관계로부터 출발해서 그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소다 카즈히로가 다루는 공동체가 이상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 집단이나 공동체는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감정적인 유대에 기초한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의 대부분 내부적으로 불안, 갈등, 모순, 부조리를 품고 있음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로 시의원 선거에 처음 나선 야마우치 가즈히코가 선거 운동 과정에서 겪는 조직과의 갈등이 그러하다. 가즈히코는 자신의 선거 운동을 돕는 활동가들과 그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규율에 동화되지 못한다. 그는 지역 유지들의 지적과 충고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거나 아침 출근길이나 저녁 퇴근길에 제 갈 길 가느라 바쁜 사람들을 붙잡고 악수를 청해야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선거 운동 방식이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그것이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유로 따른다. 선거철마다 후보자들은 입에 발린 소리로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지만 사실상 정치인들의 오래된 습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소다 카즈히로는 정치와 선거가 화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세계는 조직이 개인에 우선하고, 개인은 그런 조직의 부속품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소다 카즈히로가 삶의 표면을 기록하면서 그 표면에서 부유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성을 읽어내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 사회적 개인의 자유는 조직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통해서 획득된다. <선거 2>의 경우를 보면, 야마우치 가즈히코가 정당의 지원을 받지 않고 무소속으로 시의원에 도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작과 가장 큰 차이는 야마우치 가즈히코가 더 이상 과거처럼 침묵을 지키거나 앵무새처럼 정당의 구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조직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선거 방식의 문제점과 더불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심각성과 그에 대한 정치인들의 무관심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처럼 소다 카즈히로는 특정 개인과 집단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개인과 조직, 개인과 집단,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간극을 발견한다. 그것은 미시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개인이 겪는 몸과 마음의 상처이지만 거시적으로는 후쿠시마 이후의 트라우마와 고령화된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의 붕괴 등과 관련이 있다. 그의 카메라는 일본 사회의 어느 한 단면을 깊게 파고들면서 그 안에서 나타나는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하는 상황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해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려고 한다. 


자립과 공생: <멘탈>과 <평화>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는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소박한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 약자의 자립, 보호, 돌봄을 공적 복지의 관점에서 접근한 <멘탈>과 <평화>는 인간이 더불어 사는 방식에 대해서 묻는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그 구성원 대부분이 노인들인 일본 변두리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굴 공장>과 <항구 마을>에서도 이어진다. 이 네 작품은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이익사회를 대신해 집단 구성원들 간의 감정적 유대를 중시하는 공동사회를 일구어낼 수 있는지를 숙고한다. 


<멘탈 Mental>(2008)


<멘탈>은 일본의 소도시 오카야마에 있는 한 정신상담소를 중심으로 심신의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활동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다 카즈히로는 공동 제작자이면서 아내이기도 한 카시와기 키요코가 평소 알고 지내던 환자들과 약 2년간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키요코가 장애우를 알고 지냈던 것은 그녀의 부모님인 카시와기 토시오와 키사외기 히로코가 이동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다 카즈히로는 자신의 아내 키요코의 부모님이 장애우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평화>라는 작품에서 기록하기도 했다. 제작 순서를 고려해보면, <멘탈>은 <평화>를 낳은 작품이지만, 제작 배경을 놓고 보면 <평화>는 <멘탈>의 근원이다. 두 작품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 불가능한데, 실제로 소다 카즈히로는 특정 개인, 지역, 집단 등에 대해서 탐구할 때 그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밀도 있게 관찰하는 것을 선호한다. <선거>와 <선거 2>, <연극 1&2>, <멘탈>과 <평화>, <굴 공장>과 <항구 마을>은 각각 독립된 두 개의 작품이 하나의 짝패를 이루는 경우들이다. 소다 카즈히로가 만든 여러 작품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 사물, 인물들 또한 상호영향 관계 속에서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음은 귀 기울여 듣기를 통해 시작된다. <멘탈>의 초반부는 생활보호대상자 지정의사가 근무하고 있는 한 작은 동네 병원에 여성 환자가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의사를 마주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다. 그녀는 친구와 있었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서 방금 그 친구와 절교를 했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덧붙인다. 이 여인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시종일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태연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하던 그는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가 있던 자신의 환자에게 타인과 유대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한 가지 제안한다. 그것은 ‘나’의 일상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립과 불안에서 벗어나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시종일관 환자의 말에 무딘 것처럼 보였던 의사가 사실은 환자를 배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선지식으로 환자를 서둘러 재단하기보다는 그 환자의 말이 모두 끝나기를 기다린 다음에 그에 걸맞는 진단과 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귀 기울여 듣기의 태도는 훗날 소다 카즈히로가 자신의 다큐멘터리의 양식과 형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하게 된다. (참고로 소다 카즈히로는 자신의 관찰 영화를 만들기 위한 10가지 지침을 <멘탈>을 찍는 중에 작성한다.)

<멘탈>에서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카메라와 출연자의 상호작용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카메라를 든 연출자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다. 이 작품에서 촬영자이자 연출자인 소다 카즈히로는 순수하게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의 출연자와 간헐적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에 우울증이 심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증상이 악화되어 결혼생활과 육아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있다. 화자는 여성이며 가상의 청자는 카메라(와 그 뒤편의 소다 카즈히로)이다. 한동안 카메라는 여성의 기구한 사연을 주의 깊게 경청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문이 막혔을 즈음 카메라 뒤편의 연출자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질문을 던진다. 우선, 이 장면은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가 연출자의 개입을 완벽하게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일 수 있다. 다음으로 그 장면은 소다 카즈히로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 자체가 목적론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일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출연자의 발화가 자율적인지 타율적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부정하기 힘든 사실은 카메라가 한 여인의 비극과 그녀의 트라우마가 폭로되는 순간을 기다렸고 기어코 그녀의 입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장면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현장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관찰 영화의 양식과 방법론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런 부분이 소다 카즈히로가 추구하는 작품 전체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인물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찍기 때문이다. <멘탈>과 <평화>의 출연자들 모두 특정 인물과의 대화가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때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한다. <멘탈>과 <평화>에 등장하는 사회복지사와 그들이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보여주기/바라보기 혹은 말하기/듣기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즉, 그들은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적이고, 내밀하고, 은밀한 삶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은 겉보기에는 폐쇄적인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것은 기성의 권력과 위계를 거부하는 열린 공동체였던 것이다. 서로 어깨를 맞대듯이 서로 눈을 마주치는 사이인 그들은 서로 귀를 맞대는 관계를 통해 상호호혜에 기반한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따라서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과 그의 카메라가 현장에 개입하는 방식이 다소 문제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에 걸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 믿음, 우정, 사랑 등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가치가 있다. 그의 연출자로서의 윤리는 단순히 무언가를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끈끈한 믿음을 드러내려는 데 있다.


<평화 Peace>(2010)


소다 카즈히로의 영화에서 감정적 유대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공동체의 근원은 자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고양이가 등장하며, 때때로 그것은 작품 전체에 걸쳐서 은유적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평화>의 오프닝은 카시와기 토시오가 자신의 집 마당에 거주하고 있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시오가 고양이게 밥을 주거나 고양이들을 돌보는 장면은 영화 중반에서 두 차례 정도 반복되어 나오고, 그리고 영화 마지막 부분에도 등장한다. 토시오는 오래 전부터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일해 온 활동가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은퇴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장애인들에게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처럼 활동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과 교육을 제공하는 데 힘쓰고 있다. 토시오의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소다 카즈히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기댈 언덕이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관계이다. 그것은 길고양이가 무리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공동체의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은유로 활용하는 고양이들처럼 더불어 사는 삶이 인간 사회 속에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수 있을까?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멘탈>의 한 장애인은 경제적인 지원이 자신들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일부는 해결해줄 수 있다면서, “돈은 최고의 약이 될 수도 있죠.”라고 답한다. <평화>에서 토시오는 사회적 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과 같은 활동가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고 한탄하면서도,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을 계속하시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글쎄, 습관의 힘이랄까.” 그는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영속시키는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에 깃든 가장 아름다운 습관일 것이다. 


자연과 장소: <굴 공장>과 <항구 마을>


소다 카즈히로는 문명화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자신의 작품에 부분적으로 투영한다. 그의 영화가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민주주의, 정당 정치, 관료제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이 얽혀 만들어내는 국가-국민-민족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면서 그것을 다시금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시스템이 사회적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한다고 토로한다. 소다 카즈히로의 카메라는 그들의 주변화된 삶을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면서 기존의 시스템 바깥에서 자생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가 최근에 작업한 <굴 공장>과 <항구 마을>은 우시마라는 일본의 작은 섬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일본 남서쪽 끝 부분에 해당하는 에히메 현과 히로시마 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 작품은 각각 우시마에 있는 굴 공장과 그곳에서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소다 카즈히로가 이 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인 키요코의 외할머니가 생전에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종종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 지역에 작은 집을 하나 빌려서 머물 정도로 이 지역에 대한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우시마의 이방인이면서도 그곳을 떠나기보다는 그곳에서 머무르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은 차츰 이 지역 주민들과 안면을 트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만들기기 시작된 것이다.



<굴 공장 Oyster Factory>(2015)


<굴 공장>은 노동, 고향, 이주, 이동, 실향에 관한 복합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이 작품에는 노동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 방랑과 정착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 상품이 되어 유랑하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굴 공장 곳곳의 풍경들이 정적인 흐름과 동적인 흐름의 교차 속에서 그려진다. 거대한 기중기가 철망을 들어 올리면 바다 속에서 숨 쉬고 있던 굴들이 더미를 이룬 채로 육지 위로 옮겨진다. 이렇게 건져 올린 굴은 곧장 해안가에 위치한 굴 공장으로 보내진다. 그 공장에는 여러 인부들이 줄지어 앉아서 굴 껍데기를 까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은 왼손에 굴을 잡고 오른손에 작은 연장을 들고 마치 타악기를 연주하듯이 굴 껍데기를 까고 그 잔해를 옆으로 밀어 내고 있다. 조개껍질과 쇳덩이가 만들어내는 둔탁한 소리는 곧 인간의 노동하는 시간과 결합한다. 만약 이 장면에 음악이 덧입혀졌다면 분명 한편의 교향곡이 만들어졌으리라. 그것은 살아 있는 노동을 예찬하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우시마에 위치하고 있는 몇 개의 굴 공장을 교차편집의 형태로 보여주다가 히라노 굴 공장에 초점을 맞춘다. 이곳은 대를 이어서 가업으로 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사장인 아버지가 은퇴할 나이가 되어 그의 아들에게 가업으로 물려줄 예정이다. 일본 소상공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적 전문성을 가업의 형태로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시마의 여러 굴 공장을 포함해 히라노 굴 공장의 사정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과거 우시마에서 굴 사업이 잘 될 때에는 이곳에 15~20개 정도의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현재까지 운영을 하고 있는 곳은 6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히라노 굴 공장이 가까스로 가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의 영향이 더 컸다. 이 공장의 아들은 미야기에서 살다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인한 방사능 유출을 겪으면서 도망치다시피 아버지가 살고 있는 우시마도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전치되었거나 쫓겨난 까닭에 원치 않게 실향민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고향을 회복했지만, 기존에 살던 곳에서 반강제적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고향을 상실했다. 

고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은 우시마의 굴 사업을 변화시켰다. 영화는 우사미에 있는 일부 굴 공장에 근무하고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보여준다. 우시마도에 젊은 층이 없는 것과 더불어 도시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굴 공장에 취직하는 것을 꺼리는 탓에 일부 굴 공장은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히라노 굴 공장의 경우 수일 내로 도착할 중국인 노동자를 맞이하기 직전에 복잡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주민들의 말마따나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중국인들이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 따른 불안감도 감돌고 있다. 히라노 굴 공장은 작업장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변화를 꾀하는데, 그 중 하나가 새로 올 중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임시거처를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공장 앞으로 컨테이너가 하나 배달된다. 그것은 에어컨,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이 컨테이너 박스는 영화 전체의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피난민, 실향민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생존의 불안을 겪었던 사람들과 외화를 벌기 위해 타지에서 노동을 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모두 안식처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피난민 또는 실향민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우시마의 굴이 상품이 되어 어딘가로 떠났듯이 우시마의 굴 생산을 위해서 누군가가 그곳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글로벌한 노동 환경 속에서 사물, 상품, 노동은 영속적인 거처 없이 끊임없이 유랑한다는 점에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화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히라노 공장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 중국인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터에서 돈을 벌기 위해 우시마라는 미지의 세계에 안착했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만남을 통해 전에 알지 못하던 감각, 관습, 의례, 언어, 문화 등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매일이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언젠가 그곳에 익숙한 장소감을 획득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히라노 공장 사람들도 어색함을 잊어버리고 일상의 감각을 회복할 것이다. 그렇게 개인과 집단은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이처럼 중국인 노동자의 등장으로 인한 일련의 변화가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는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삶의 매순간은 변화의 도정에 있고, 다큐멘터리는 그 변화의 순간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영속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소다 카즈히로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지점이 변화의 순간을 기록하고 그것을 보존하는데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모든 순간들은 변하지만, 종종 우리는 그 순간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여행 중에 사진을 찍거나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 함께 사진을 찍는 거죠. 우리는 경험을 보존하고 싶어 합니다. 같은 논리를 다큐멘터리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우리가 이 순간을 보존하길 원하고, 영화라는 것이 단순히 이미지와 사운드뿐만이 아니라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강력한 매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제 영화의 카메라는 사라지는 것을 찍으려고 합니다.”


<항구 마을 Inland Sea>(2018)


<항구 마을>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굴 공장>과 <항구 마을> 모두 우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자가 마을 안과 밖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물결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세파를 견뎌내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 사물,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 중심에는 한 노파가 있다. 그는 90세에 가까운 나이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홀로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는다. 이 노인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다 카즈히로는 두 개의 눈을 활용한다. 그것은 인류학자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어느 강연에서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인류학은 가까이서 바라보는 시선과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을 겸비하여 어떤 세계를 조직하는 사물의 질서를 포착해내고, 다시 그것을 통해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아온 인간의 본성과 문화적 보편성을 끌어내는 것이다. 

소다 카즈히로는 한 어부의 작업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다. 노인은 그물을 손질한 후 직접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간다. 그물을 던지고 다시 그물을 길어 올리기를 반복한 다음에 그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일일이 손으로 떼어낸다. 그의 얼굴과 손에 깊이 파인 주름은 그가 살아온 시간을 웅변하고 있다. 한편, 노인의 작업 과정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는 소다 카즈히로의 카메라는 종종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노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러한 연출은 특정 인물의 얼굴을 통해 감화 작용을 일으키려는 목적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이 기이한 클로즈업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소다 카즈히로와 그의 촬영 대상자인 노인의 독특한 관계 때문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이유인 즉 노인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소다 카즈히로가 촬영 중 노인과 대화를 할 일이 있으면 그에게 한발 더 가갔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 또한 독특하다. 허리가 구부정한 탓에 그는 자신의 상체를 기역자로 굽혀서 카메라를 비스듬히 바라본다. 카메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화면의 구도는 어딘가 모르게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어처럼 이 영화는 촬영자와 출연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고유한 형식을 획득한 경우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지역성, 장소감, 공동체성를 근거리에서 형상화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획득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는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소다 카즈히로는 인류학자들이 원시부족을 포함한 특정 부족, 공동체, 사회의 시공간적 규칙을 알아내기 위해 긴 주기를 두고 사물이 이동하는 궤적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순환의 법칙을 탐구해냈던 것처럼, 우시마의 한 어부가 낚은 물고기들이 누구의 손의 거쳐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뒤쫓는다. 단계적으로 살펴보자면 노인이 잡은 물고기는 우시마 수산협동조합에서 이루어지는 경매를 통해 인근 지역의 소상공인들에게 팔려나가고, 그 소상공인들은 생선을 손질해서 주민들에게 판매한다. 소다 카즈히로는 노인의 물고기가 지역 주민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는데, 그 과정에서 코소 생선 가게의 주인을 집중적으로 촬영한다. 그녀는 나흘 가까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아직도 어색하다면서도 결혼 후 약 50년 가까이 가게를 운영한 자신의 생애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녀는 75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직접 트럭을 몰고 생선을 팔러 다닌다. 그녀는 직접 운전을 하거나 발로 뛰면서 자신과 자신이 판매할 생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반대로 주민들은 그녀의 트럭을 기다린다. 여기서 우리는 한 노인이 잡은 생선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마을 주민들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엮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생산, 유통, 소비로 이어지는 사물/상품의 흐름으로 설명하기 힘든 성질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생선의 이동은 일회적이거나 이벤트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순환적인 의례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그러했듯이 내일 또한 노인이 잡은 생선은 마을 주민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순환하면서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엮어 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우리 네 삶이 반복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익숙해서 편안한 그런 삶.

이처럼 소다 카즈히로는 가까이서 보는 시선과 멀리서 보는 시선을 교직하여 우리가 간직해야 할 인간적인 삶의 본성을 탐구한다. 그것은 장소감의 회복, 노동의 숭고함, 공동체의 결속 등으로 요약 가능하다.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 대부분은 인간의 존재론적 뿌리가 있는 집, 고향,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노동을 통해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명예를 획득하는 가운데 그러한 노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며,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이타적인 공동체를 구성한다. 혹자는 소다 카즈히로의 작품에서 핵심을 이루는 인간, 자연, 과거, 공동체 등이 노스탤지어로 환원될 수도 있음을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혹을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소다 카즈히로의 카메라는 기록한 인간, 자연, 과거 등은 추상이 아닌 구체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의 카메라는 눈앞에 현현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그 세계를 경험한 시간 그 자체를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는 현장에서의 경험을 그 자신의 정언으로 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