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시계를 안고, 종말 바깥으로: 비간과 후보의 영화들

CRITIQUE 
2020.3.20 OKULO online exclusive


멈춘 시계를 안고, 종말 바깥으로
: 비간과 후보의 영화들

김혜림


영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폐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 다만 그 방식이 폐허를 떠나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향하는 과정이 아닌 폐허에서 또 다른 폐허로 이동하는 과정이라면, 혹은 폐허에 남은 흙더미를 조금씩 파헤치면서 생성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방식이라면, 영화는 분명 생성 이후의 것을 응시할 수 있다. 최근 발표된 일련의 중국 영화들이 그렇다. 비간의 <카일리 블루스>[원제는 '노변야찬(路边野餐)'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소설 『노변의 피크닉』의 중국어 제목에서 따 온 것이다]에서 <지구 최후의 밤>으로의 이동, 후보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내부의 세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동은 폐허에서 폐허로의 이동이거나 혹은 폐허 내부를 파헤치는 방식이지만 상실과 그 잔해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그 이동의 끝에는 한줌의 무언가가 남아있다. 



<지구 최후의 밤>


앞서 언급한 세 영화의 인물들이 머무는 장소가 폐허라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다. <지구 최후의 밤>의 뤄홍우가 머무는 자리는 떨어지는 물에 의해서 곰팡이가 슬었거나 녹슬었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웨이부는 성냥에 불을 붙여 아파트 통로 천장에 수많은 그을림을 남기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집을 폐허화(廢墟化)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일리 블루스>의 첸이 종종 들르는 동굴은 온통 회색 빛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은 폐허이기 때문에, 혹은 폐허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은 집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한다. 이들에게 집은 안정을 주는 장소가 아니다. 이 경향은 많은 현대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페드로 코스타의 폰타이냐스 3부작이나, 최근 화제가 되었던 봉준호의 <기생충>에서도 집은 땅 속에 묻혀 있거나 허공에 지어진 것처럼 불안한 장소다. 집은 너무 낮은, 혹은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위태로운 곳에 놓인 집은 편안한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장소는 집의 모습을 하고 있는 폐허가 아니라 폐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집이다.

집의 흉내를 내고 있는 폐허에 더이상 남아 있을 수 없기에 그들은 이동을 택한다. 후보와 비간의 작업에 차이가 있다면 비간 영화의 주인공들은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만 집을 나올 때와 집으로 돌아갈 때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독특한 시간성이다. <카일리 블루스>의 마지막 장면, 양양이 돌아오고 첸이 다시 떠나는 것을 암시하는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는 이동과 시간 자체를 합쳐놓는다. 기차가 이동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결코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꽤나 모순적인데, 기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뒤로 이동한다. 이 역설은 <지구 최후의 밤>에서 보다 도식적이고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폭죽이 암시하는 순간과 시계가 암시하는 영원은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바꾼다. 뤄홍우가 카일리로 돌아온 후 목격하는 것은 고장난 시계, 그리고 시계의 자리에 걸리는 죽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시계는 고장났기 때문에 순간을 가리키며, 고장났기 때문에 영원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명시적인 영원성과 합쳐지는 것은 비간이 계속해서 말해왔던 기억의 속성과 얼마간 닮아 있는 것이다. 



<카일리 블루스>


<지구 최후의 밤>의 뤄홍우는 기억과 영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영화와 기억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진실과 거짓이 섞인 채 수시로 눈 앞에 떠오른다” 뤄홍우는 기억에 의지해서 완치원을 찾아 떠나지만 실상 뤄홍우가 가지고 있는 완치원에 대한 기억은 기억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앞서 언급했듯 영원성과 순간이 동일선상에 놓이기 때문이다. 완치원과 관련한 기억은 밤에만 일어난다. 이는 진실과 거짓 모두를 편집이라는 영화적 기법을 통해 엮어낸 거짓 시간성이다. <지구 최후의 밤>의 2부, 순간으로서의 밤만이 존재하면서 밤은 영원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쇼트인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영화관 장면에서, 그간 상승하던 담배 연기는 뒤집힌 화면 속에서 물처럼 하강한다. 하강하는 연기는 뤄홍우의 기억이 진실과 거짓이 섞인 무언가가 아닌 진실을 편집이라는 커다란 거짓 속에 담아낸 것임을 보여준다.

뤄홍우가 카이전과 만나 허공을 날아다니고 방을 회전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말처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치원에 대한 거짓 정보와 기억을 카이전의 존재를 통해 현실화하는 것이다. 뤄홍우가 완치원과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카이전과 만나게 되면서 영화의 내용과 태도는 정확히 반전된다. 완치원이 등장하는 1부는 마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찍혀 있지만 실상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고, 카이전이 등장하는 2부는 환상만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실제적이고 물리적으로 찍혀 있다. <지구 최후의 밤>이 가져다주는 기묘한 감각은 완치원과 카이전, 하나의 얼굴에서 정확히 반대되는 속성이 뿜어져나오는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이것이 히치콕의 <현기증>의 매들린과 주디를 완치원과 카이전에 정확히 대입시키기 꺼려지는 이유다. 매들린-주디와 달리 완치원-카이전은 사람과 유령, 혹은 물체와 그림자 사이의 관계와 비슷해보인다. 

<카일리 블루스>의 첸이 만나는 두 명의 웨이웨이의 관계는 <지구 최후의 밤>의 완치원-카이전의 관계와는 다르다. 완치원-카이전이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것과 달리, 각각의 웨이웨이는 다른 얼굴의 같은 존재다. 뤄홍우가 완치원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를, 카이전을 보고 완치원을 떠올리는 것과 달리 첸은 웨이웨이를 찾아 전위안으로 왔지만 웨이웨이를 보고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다만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뿐이다. 다른 존재임을 알면서도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가는 것과 자신이 찾던 사람과 같은 존재임을 알면서도 또 다른 만남을 만들지 않는 차이는 두 영화가 갖는 시간성에서 비롯한다. 

<지구 최후의 밤>의 시간성은 영원과 순간 사이의 등치이다. 반면 <카일리 블루스>의 시간성은 역행과 생략이다. <지구 최후의 밤>의 시간성은 거짓 기억의 속성을 닮아 있는 반면, <카일리 블루스>의 시간성은 실제적으로 존재했던 생생한 과거를 애써 거짓처럼 보이게 한다. <카일리 블루스>의 가장 이상한 지점은 영화에서 얼마 안 되는 시간처럼 보이는 그 짧은 순간이 흐르는 동안 웨이웨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훌쩍 커 버린 것에 있다. 첸이 카일리에서 전위안으로 갈 때는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생략되고, 영화의 종반부에 첸이 전위안에서 카일리로 돌아갈 때에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첸의 뒤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웨이웨이가 그린 거꾸로 흐르는 시계는 카일리에서 전위안으로 향할 때 생략된 시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희미하고 거짓된 시간성은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불러온다. 전위안의 웨이웨이가 카일리의 어린 웨이웨이를 손목에 그린 가짜 시계로 불러오듯이 말이다. 이 속성은 영화 전반을 둘러싸고 있다. 양양이 여행 가이드 연습을 하며 말하는 카일리에 대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정보가 바닷물 소리 그리고 웨이웨이의 음성을 통해 낭만적이고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 혹은 첸이 처음 만나는 미용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둔갑시켜 이야기하는 것 등이 그렇다.

비간의 두 영화에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담긴 정보는 인물들이 시간 속을 이동해가는 과정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굴절된다. 이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집을 떠나오는 과정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구 최후의 밤>은 종말론이 횡행했던 1999년 이후, 200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취한다. 사실상 ‘지구 최후의 밤’은 ‘종말 이후의 밤’이다. 종말은 곧 폐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끔 한다. 디스토피아는 회색빛이고, 상실이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이다. 세 영화는 디스토피아적 상실을 이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후보의 영화 <코끼리는 그 곳에 있어> 역시 그렇다. 다만 이 영화의 이동은 비간의 두 영화의 이동과는 다르다. 비간의 영화에서는 이동 과정 자체가 중심이 되는데 반해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는 이동을 준비하는 과정이 중심이 된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지구 최후의 밤>과 <카일리 블루스>가 폐허와 폐허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이들이 벗어나고자 하고 또 벗어나야만 하는 곳이 왜 폐허인지를 보여주는 일에 집중한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파편적인 시간성을 등에 이고 이곳저곳을 이동하는 비간의 영화와 달리, 후보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직선적인 시간 속을 이동하면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네 인물의 상실을 다룬다. 비간의 카일리 연작이 상실된 것처럼 보이는 것(하지만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회복하기 위해 이동한다면,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인물들은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코끼리를 보기 위해서 자신들의 폐허를 떠난다. 집처럼 보이는 폐허에서 그들은 자신의 상실을 상실 그 자체로서 드러내지 못한다. 웨이부는 집과 학교를 떠나 잔해만이 존재하는 황무지에서 응어리진 고함을 내지를 때 비로소 자기자신이 된다. 이때의 고함은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고함에 가깝다. 반면 왕진의 강아지를 죽인 흰 개의 주인의 고함은 자신의 것을 잃지 않으려는 고함에 가깝다. 전자의 고함은 비어 있기에 편안하지만 후자의 고함은 꽉 차 있기에 듣기 불편하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코끼리가 있는 만저우리로 이동하기 전까지 자신의 상실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한다. (중국의 북쪽, 러시아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만저우리에는 실제로 앉아 있는 코끼리상이 자리해 있다.) 위청이 만저우리로 향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상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진과 웨이부, 황링은 상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상실과 싸운다. 음식도 거부하고 앉아 있기만 하는 코끼리는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채 싸워나가는 세 인물과 닮아 있다. 후보는 코끼리를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가늠하게끔 한다. 그리고 상실을 받아들인 이들이 제기차기를 하는 모습과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중첩되는 마지막 장면을 관객이 응시하도록 하면서 당신은 이러한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영화가 끝나면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시간성은 무한히 확장된다. 4시간 34분의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네 인물들의 하루를 채 넘지 못하고 끝난다. 인물들의 상실이 죽음, 곧 영원과 연결되어 있듯, 이 영화의 끝맺음, 곧 죽음은 관객에게 영원으로 다가온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보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 영화 도처에 번져 있는 상실처럼 다가오는 듯한 감각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페드로 코스타는 “사람을 찾고 장소를 찾아서 그 속에서 다른 이야기가 발견되면 영화는 시작된다”고 말했다. 세 영화의 인물들이 계속해서 이동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찾기 위함일 테다. 그들이 택한 이동의 목적지는 폐허 바깥이 아닌 폐허 내부였다. 사람과 장소를 찾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들 스스로가 영화가 되었다. 이들의 영화는 계속해서 순환하지만 동일한 노선을 타고 반복적으로 회전하지는 않는다. 점차 넓어지는 나선처럼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운동한다. 폐허의 영화들은 영화 자체가 잔해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나가는 예술이라고 고요하게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