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뜻으로 큰길이 되기: 더들리 앤드류의 『앙드레 바쟁』

REVIEW
2020.4.10 OKULO online exclusive


큰 뜻으로 큰길이 되기
더들리 앤드류의 『앙드레 바쟁』 

함연선



『앙드레 바쟁』(더들리 앤드류 지음, 임재철 옮김, 이모션북스, 2019)




가파른 언덕에 형성된 마을을 관통하는 대로가 있다. 마을버스를 타든, 택시나 타다를 타든 우선은 그 대로를 따라 언덕을 오른 다음에야 세부적인 골목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바쟁은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게 된 마을이 가진 대로와 같은 존재다. 복잡한 경로를 시작하기 앞서 별 신경 없이 쭉 올라가면 되는 대로이자, 골목길들이 파생되기 시작하는 지점들의 모음이기도 한 큰길.

오래전 언덕에 형성된 마을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재개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얼마 전까지 전시 《propping》이 열렸던 북아현동이 그런 동네다. 반대로 갤러리2가 위치한 평창동과 같은 부촌은 사실 차 없는 사람들은 택시를 타지 않는 이상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동네다. 영화 비평계는 어떤 동네인가.

(저자인 더들리 앤드류가 밝히고 있듯 미국에서 바쟁이 ‘나쁜 대상’으로 간주되던 시기인) 1978년에 발간되었고, 바쟁과 함께 《에크랑 프랑세즈》에서 활동했던 장-샤를르 타켈라가 쓴 보유(「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바쟁: 투쟁과 봉헌의 시대)가 덧붙여져 2013년에 개정판이 나온 평전 『앙드레 바쟁』을 읽다 보면, 영화 비평계라는 동네가 녹록지 않은 사정의 사람들이 어렵사리 만든 동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에 한정해서 볼 때, 1920년대에 나타난 영화 잡지들과 뒤이어 생겨난 시네 클럽들의 활성화는 1930년대에 닥친 경제 불황과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부침을 겪게 된다. 여기에 치명상을 가한 것은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지식인들의 이탈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성 영화는 진지한 예술이 될 수 없다”(226쪽)고 주장하며 영화로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부터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지식인은 바쟁을 포함하여 그가 큰 영향을 받았던 로제 레엔하르트와 앙드레 말로 등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바쟁은 샤를 뒤보스, 알베르 베갱, 자크 마리탱과 같은 베르그송주의자들을 통해 베르그송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무엇보다 기독교 행동주의의 마르셀 레고와 《에스프리》를 통해 인격주의를 견지한 엠마누엘 무니에의 사상이야말로 청년 바쟁이 온몸으로 소화해낸 것이었다. 생 클루 고등사범학교 시절 그는 실증주의적이고 답답한 분위기로부터의 대안을 찾아 마르셀 레고의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게 된다. 레고는 우주가 진화한다고 믿는 이였으며 개인주의를 진화의 진전된 한 단계로 보았다. 그는 진화가 개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개인 내부의 혁명이 필요하다 보았는데, 그 혁명이란 개인들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는 사회 혹은 공동체가 있을 때에야 가능했다. 이러한 감각은 바쟁의 삶에서 뿐 아니라, 모든 영화들이 영화문화의 견지에서 가치가 있다는 그의 진화론적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론된다. 한편 철학에서 “체계화의 경향”과 “유아론의 경향” 사이에 인간을 위치시키려는 하나의 방법 혹은 관점으로서의 인격주의 운동을 대변했던 엠마누엘 무니에는 무의미한 혹은 무방향적인 우주에 대한 반응으로서 건설적인 행위를 촉구하며 “삶의 애매성과 그것의 혼란스런 희망에 충실”(95)하기를 주장했다. 바쟁이 영화작가들로부터 발견하는 ‘스타일’은 그러한 건설적인 행위의 일환인데, 그가 스타일이란 “표현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외부를 탐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적인 정향(orientation)”(95쪽)이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인격주의의 영향이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바쟁을 영화로 이끈 것은 《에스프리》에 실렸던 로제 레엔하르트의 영화 칼럼들이었다. 레엔하르트의 주요한 작업인 5부작 구성의 에세이 “관객들의 작은 학교”는 영화라는 매체가 다른 예술에 비해 특권적으로 갖는 현실과의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하며, 촬영된 소재 자체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당대의 지배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유성 영화를 긍정했다. 그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수사적이라고 비판하며, “제작에서 미장센의 제대로 된 역할은 미장센이란 것이 없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연기나 장치를 통해 의도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단순히 “렌더링”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92쪽)라며 바쟁을 예견케하는 주장을 펼쳤다.

바쟁이 자신의 작업을 개진하는 데 있어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이나 비평가들에 대해 다뤄지는 『앙드레 바쟁』의 앞부분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의 무지에 대해 걱정하고, 스스로를 의심했으며 철학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딜레탕트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것을 걱정했다는 부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비평가로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과업을 설정했고, 그 과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했으며, 결국에는 “폭 넓고 주의 깊은 독서”(124쪽)를 통해 그것들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비전’을 제공한 건 독서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문화센터였던 메종 데 레트르의 영화 스터디 그룹에서 만난 장-피에르 샤르티에와 함께 시네 클럽을 운영한 경험이 그에게 ‘비전’을 획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더들리 앤드류에 의하면 이러한 경험과 독서의 종합으로 그는 1944년경 “문체상의 솜씨”와 더불어 “철학적 사고의 발전”을 동시에 확립할 수 있었다. 그가 1918년생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그의 나이 26세 때임을 알 수 있다.

1949년까지 그는 다양한 매체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글을 기고했고(약 15년간의 활동 기간 동안 그는 2천 5백 편 이상의 글을 썼다), 또 유럽 전역으로 영화에 관한 강연을 하러 다녔다. 《파리지앵 리베레》에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글을 기고했다면, 《에크랑 프랑세즈》에는 그보다 조금 더 심화된 글을 기고했고, 그의 마음의 고향과 같은 《에스프리》에서는 길고 풍부한 내용의 에세이들을 쓸 수 있었다. 한편 바쟁의 미국 영화에 대한 관심과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에)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영화들에 대한 미학적인 차원에서의 가차 없는 비판은 그를 1944년부터 그의 직장이었던 '노동과 문화'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끔 했다. 이어 그는 예술로서의 영화에 보다 관심을 갖는 시네 클럽을 조직하게 되었는데, 다소 엘리트주의적이었던 그 모임의 이름은 오브젝티브 49이다. 동시에 그는 프랑수아 트뤼포와 그의 젊은 동료들을 만나면서 전자와 후자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이는 “오브젝티브 49가 파리의 영화문화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힘과 돈이 있는 반면에, 좌안의 비평가들은 그 힘을 방출하게 하는 욕망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234쪽)에 중요한 일이었다.

1949년 바쟁은 폐결핵을 앓게 되어 활동하던 많은 일에서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 즈음하여 《르뷔 뒤 시네마》(1927년 장-조르쥬 오리올이 창간했고 1946년 같은 인물에 의해 복간된)가 재정상의 문제로 정간되면서 프랑스에는 제대로 된 영화 잡지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13년도에 쓰여진 개정판 서문에는 1950년의 시점에서 바쟁이 직면한 세 가지 위협이 언급되어 있다. 맨 처음에 오는 것이 정치적인 전선에서의 스탈린주의라면, 비평적인 전선에서는 필르몰로기(Filmologie)가, 예술적 전선에서는 레트리즘이 가세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이 바쟁을 ‘새로운 소명’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상정하는 구조에 강력하고 효과적인 비평을 써넣을 필요성”(257쪽)을 느꼈고, “관객을 바꾸고, 영화를 바꾸며, 그리하여 프랑스의 문화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257쪽)던 것이다. 바쟁은 자크 도니올-발크로즈와 함께 《르뷔 뒤 시네마》를 되살릴 기회를 끈질기게 찾고 있었고, 1951년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간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는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필진들은 특히나 해당 잡지의 초기에 바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진화론적인 역사관은 플래허티, 무르나우, 르누아르, 비고, 로셀리니 등 “위대한 감독들의 역사지”(276쪽)를 만들어냈고, 이는 한편으론 작가 정책으로 발전했다. 주지하다시피 바쟁은 훗날 작가 정책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1950년대 초 그가 쓴 에세이들은 확실히 작가 정책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대해 더들리 앤드류는 바쟁의 경력을 두 단계로 나누며, 첫 단계가 영화이론을 위해 “사진의 우선성”을 확립하고 현대 영화를 위해 “네오리얼리즘의 우선성”을 확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 바쟁은 시네-에크리튀르를 확산시켰다고 판단한다. 그 두 번째 단계가 바로 이 195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카이에》의 판매 부수는 5,000부 정도였지만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 두 배가 될 만큼 커졌고, 1955년 이후로는 에릭 로메르가 편집인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되었다. 로메르의 강경한 작가주의 노선이 《카이에》를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이는 바쟁과 작가주의자들 사이의 일종의 집안 싸움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바쟁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긴장’이었다. 가령 '노동과 문화'에서 바쟁은 그의 공산주의자 동료들과 긴장 관계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에》에서는 또 어떤가. ‘집안 싸움’이 일 만큼 작가 정책에 대한 그와 그의 '피후견인들' 사이의 긴장은 명백해 보였다. 독일 점령기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지하면서도 영화가 정치적 활동에 쓰이는 것에 반대한 입장도 긴장의 맥락에서 파악 가능하다. 영화를 대중예술로 보는 감각과 함께 다소 엘리트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천재성의 관념(『오손 웰즈』나 『장 르누아르』와 같은 단행본을 낸 그의 행보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지녔던 그의 비평적 태도에서도 긴장이 발견된다. 바쟁이 파악한 영화라는 매체의 삶에서도 역시 ‘긴장’은 중요한 것이었다. (플래허티, 네오리얼리즘, 장 르누아르의 영화와 같은) “창조적인 다큐멘터리 장르”(183쪽)가 가장 그 가까이에 근접할 수 있었던 영화 매체에 내재된 긴장 혹은 역설은, 현실이 스크린 상에 “리얼하게” 보이도록 해야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리얼하게 보이는 스크린 상의 현실에 “경험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183쪽) 의미를 부과해야 하는 영화작가의 사명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40세가 되던 해인 1958년 당시에 바쟁은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죽기 전날까지 그는 (훗날 《텔레라마》가 되는) 《라디오-시네마-텔레비전》에 보낼 〈랑쥬 씨의 범죄〉에 관한 원고를 썼다. 바쟁의 죽음 후에, 《프랑스 옵세르바퇴르》에 장 르누아르가 보낸 에세이는 영화 만들기에까지 미친 바쟁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르누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국민적 예술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나의 영화를 위한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57쪽) 바쟁의 죽음 후에 ‘누벨바그’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었고 큰 주목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큰길의 끝에서 그들은 각자가 선택한 골목을 따라 여정을 시작했다. 이 책 『앙드레 바쟁』이 바쟁이라는 도착지로 가는 경로에 충실한 대로가 되어주듯이, 앙드레 바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화를 탐색하는 데 있어 큰길이 되어주고 있다. 그것은 모바일 지도 어플에 보이는 일직선의 대로와도 같다. 길을 잃을지언정 길을 잃었다는 감각을 깨울 수 있는 기준이 되어주면서 말이다. (가끔은 길을 잃는 것이 맞을 때도 있다.) 더들리 앤드류가 말한 바쟁의 “두 번째 삶”이란 그런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