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

CRITIQUE

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

오준호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 이 글은 2015년 제12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에서 발표했던 「시(詩) 정신과 문화영화의 혼종: 시네포엠(1964-1967)의 전위영화 개념과 실천과 현재 진행 중인 연구 내용 중에서 유현목 감독이 연출했던 <손>(1966/1967)[1]과 관련된 내용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연구를 일부 추려서 발표하는 이유는 2016년 5월 20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손>이 (<오발탄> 복원판과 함께)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기 때문에 작품과 관련된 사실들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오큘로』 발행인 유운성 씨가 권유했고, 이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손>과 관련된 사실들을 정리하고,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간단히 적고자 한다.)




한국 최초의 전위영화 동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시네포엠과 시네포엠 동인 회원으로서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단편영화 <선(線)>(1964)과 <손>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현재 총 11편의 신문기사만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남아있는 기록들이 부분적이어서,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라진 연결고리들을 당대의 지형 하에서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이 종국에 도달하는 지점은 시네포엠 동인들, 더 좁혀서 유현목 감독이 인식했던 실험영화가 오늘날 우리가 북미나 유럽 실험영화들의 정전들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는 실험영화와 같은 맥락에 있는가의 여부이다. 만약에 같은 맥락에 있다면 실험영화가 국내에 어떻게 유입되었고 이해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만약에 다른 맥락에 있다면 당대에 실험영화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이 글의 목적과 지면을 벗어나므로 추후에 연구논문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며, 여기서는 <선>과 <손>을 실험영화로 단정하는 일을 유보할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손>에 집중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총 11편의 신문기사 중에서 <손>이 언급된 기사[2]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상영시간 50초의 “이색적인 문화영화” <손>이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국제문화영화 컨테스트”에 수일 전에 출품되었다. “「인간과 그 세계」란 주제로 열리는 이 영화 컨테스트는 상영시간 50초라는 제한 때문에 세계 각국의 전위적인 문화영화가 다투어 출품될 것이 예상된다.” 감독 유현목, 각본 최일수, 촬영 김기국, 녹음 박익순, 조명 고해진이다. (『경향신문』 1966.12.26)

2.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되는 국제박람회 당국이 모집하는 “국제문화 및 실험영화 콘테스트”에 시네포엠이 <손>을 출품한다. “「인간과 그 세계」라는 주제의 이 콘테스트에 참가케 된 <손>은 최일수 원(原) 유현목 연출로 된 이색적인 50초짜리의 35mm 흑백. 이 콘테스트에서 1등은 1만불의 상금이 수여되고 10등짜리는 메달을 주며 입선작은 전세계의 텔레비죤 망을 통해 공개된다. 이 상은 내년 4월에 발표된다.”(『동아일보』 1966.12.30)

3. “그가 주장하는 그의 「독창적」인 영상주의는 ‘시간과 공간의 용기(즉 영화란 예술수단)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한 새 차원의 관념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지난 정월 초하루 <영혼의 촉감>이란 1억원이 들 40분짜리 전위영화를 구상해봤지만 우리현실에서는 그건 「원단(元旦)의 꿈」이라고. 그러나 이미 25만원으로 만든 12분짜리 <선>, 2만 3천원의 경비로 50초짜리 <손> 등 그가 소속한 「시네포엠」의 이름으로 전위영화를 만들었다.” (『동아일보』 1967.01.26)

4. “유 감독이 주장하는 그의 ‘독창적인 영상주의’는 ‘시간과 공간의 용기(즉 영화란 예술수단)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한 새 차원의 관념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그는 이미 25만원으로 만든 12분짜리 <선>, 2만 3천원의 제작비로 50초짜리 <손> 등 ‘시네포엠’ 형식의 전위영화를 만들었다. 미래교육수단의 주류를 이룰 ‘교육영화’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기도 하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세계는 ‘사회의 밑바닥을 그리면서 그에 대한 모순성의 해부와 절망적인 현대인의 형상에 대한 부단한 추구’란다.” (『동대신문』 1970.11.23)

5. “시네포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은 50초짜리 <손>이다. 첫 장면은 건강한 남자의 손. 이어 전쟁 장면이 나오고 갈고리 손이 등장한다. 그 손에 비둘기가 내려 앉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반전 평화의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캐나다 모 TV 방송의 공모전에 입선까지 했다. 시네포엠은 제작비 등의 여건상 중도 하차하게 되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단편 실험영화 그룹이었다.”(경향신문』 1998.02.05)

이 기사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966년 12월에 시네포엠은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손>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당국이 주최하고 “인간과 그 세계”를 주제로 하는“국제문화영화 컨테스트(혹은 국제문화 및 실험영화 콘테스트)”에 출품하였다. 이 콘테스트는 상영시간 50초 길이의 작품을 공모하였다. 콘테스트의 우승자에게는 1만불이 수여되고 10등까지는 메달이 수여되며, 입선작은 전세계 텔레비전 망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었다. 유현목 감독은 2만 3천원(현재 시점으로 화폐가치를 계산하면 70만원 정도)으로 <손>을 제작했다. 유현목 감독은 1998년에 캐나다 모 TV 방송국 공모전에서 <손>이 입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손>은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손>을 비롯하여 시네포엠 활동에서 유현목 감독은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한 새 차원의 관념세계를 구축”하는 영상주의[3]를 추구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신문기사를 검색하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들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가능해진다. “인간과 그 세계”를 주제로 했다고 하는 국제문화영화 컨테스트라는 것은 대체 어떤 성격의 행사였는가? 유현목 감독은 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에 영화를 출품했을까? 시네포엠은 1964년 1월 18일에 설립되었고, 같은 해 6월 첫 작품 <선>의 제작에 들어간 이후 특별한 활동이 없었는데 왜 2년만에 다시 작품을 만들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다시 또 다른 연구문제와 연결되는데, 시네포엠이 동인으로서 갖는 성격은 무엇이었나라는 점이다. 이 문제도 비어있는 사실들이 많아서 시네포엠에 참여했던 개별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 역시 지면의 한계를 벗어난다. 여기서는 시네포엠이 사실상 유현목 감독의 스태프들과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인들이 주축이었던 단체였다는 점만 우선 언급한다.

<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박람회가 주최한 국제문화영화 콘테스트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질문이 내가 <손>이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퀘벡시네마테크(La Cinémathèque Québécoise)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신문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국제문화영화 콘테스트라는 것은 당연히 그런 이름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단서는 신문기사에 나와 있는 대로, “인간과 그 세계”라는 주제, 50초라는 상영 길이, 그리고 시상 내역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찾아보니, 1966년 2월 9일자 몬트리올 가제트 The Montreal Gazette』 39면에서 「Instant Film이라는 제목의 기사[바로가기]가 발견되었다. 이 기사는 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의 주제인 “인간과 그 세계”에 맞는 50초 길이의 작품을 공모하여 우승자에게 금메달과 1만 달러를 수여할 것이며 1위 이외의 입상자에게는 9명까지 은메달을 수여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몬트리올국제박람회가 이 경쟁부문의 상금을 후원했고, 기획은 1967년 제8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가 맡았다. 입상된 총 10편의 작품은 몬트리올 국제박람회의 공연예술 세계축제 행사의 일부분인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계획이었다. 50초의 상영 길이는 극장뿐만 아니라 TV 방송에까지 범용적으로 상영될 것을 고려했기 때문에 제시된 분량이었다. 이 기사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공모의 마감이 1966년 10월 1일인데, <손>이 1966년 12월에 출품되었기 때문에 <손>은 애초에 공고된 마감일을 넘겨서 출품되었다는 것이다. 마감일이 연장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한 후에 나는 <손>이 몬트리올엑스프 혹은 몬트리올국제영화제 관련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hand', 'man and his world', 'Yu Hyun-Mok' 등을 키워드로 해서 도서관이나 시네마테크 등을 검색해 보았는데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몬트리올이 불어권이므로 불어로 'Concours terre de hommes'를 검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 이후 몬트리올 소재 대학 및 공공 도서관을 검색하다가 퀘벡시네마테크 컬렉션에서 “Concours terre de hommes”으로 검색해보니 총 107편의 작품이 해당 명칭으로 분류되어 있고 이 중에 <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때가 2015년 6월 경이었다. <손>의 소재를 파악하고 난 다음에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이행준 프로그래머에게 <손>을 개막작으로 상영할 것을 제안하였고, 동의를 얻어 퀘벡시네마테크 담당자와 상영 관련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때가 휴가철이어서 연락이 지연되다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이 FIAF(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Archives) 회원 기관이 아니므로 작품 대여가 불가하며 회원 기관인 한국영상자료원에 문의하라는 답신을 받았다. 동시에 퀘벡시네마테크 담당자가 한국영상자료원에 서울국제실험영화제가 <손>의 프린트를 대여하거나 복사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손>을 수집하게 되었다. 이 과정이 시간이 다소 소요되었기 때문에, 작년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는 결국 상영을 못하게 되었고, 상영과 함께 계획되었던 발표(시(詩) 정신과 문화영화의 혼종: 시네포엠(1964-1967)의 전위영화 개념과 실천」)만 진행하게 되었다.




<손> 프린트의 소재를 발견하게 된 과정 설명이 다소 길었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유현목 감독이 <손>이 모 TV 방송국에 입선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바가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과 그 세계” 경쟁에서 수상한 총 10편의 작품 리스트를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는데, 경쟁부문 심사를 맡았던 심사위원들의 평을 실은 1967년 7월 22일자 오타와 저널 The Ottawa Journal 기사[바로가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기사는 경쟁부문에 37개국에서 870명의 감독들이 작품을 출품했다고 밝히고 있다. 1위 입상작은 체코의 파벨 프로하스카(Pavel Prochazka) 감독의 애니메이션 <인간의 건강 The Health of Man>이었다. 오타와 저널 63페이지에는 해당 작품의 스틸 이미지까지 함께 실렸다. 심사위원들은 출품된 작품의 일반적 경향으로 반전 메시지를 담았고, 인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인류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이 기사는 경쟁에서 총 94편의 작품이 선정되어 8월 4일 몬트리올국제영화제의 개막식에 선보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몬트리올 가제트 기사에서는 10위까지의 수상작만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보다 늦은 오타와 저널 기사에서 총 94편이 상영될 것이라고 보도된 것을 볼 때, 유현목 감독이 모 TV 방송의 공모전에서 입선했다고 기억하는 부분은 이 94편 안에 <손>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8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의 공식 카탈로그가 존재하는지, 있다면 여기에 <손>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퀘벡시네마테크에 보관된 “인간과 그 세계” 경쟁 107편 중에 <손>이 포함되어 있고, <손>의 주제가 심사위원들이 밝히는 출품작의 경향과 동일하며, 유현목 감독의 진술로 미루어볼 때, <손>이 공식 상영작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기까지가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손>의 입선 여부에 대한 추론이다. 이후부터는 이 사실들과 다른 단서들을 결합해서 추정되는 바를 하나의 가설로 제기하고자 한다. 다시 질문은 왜 시네포엠은 <손>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으며 어떻게 캐나다 몬트리올국제박람회가 후원했던 경쟁부문에 출품하게 되었던 것인가이다. 

시네포엠이 유현목 감독의 스태프들과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인들이 주축이 된 동인이었다는 사실, 1963년 국립영화제작소가 캐나다국립영화위원회(NFB: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와 문화영화 교류 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 그리고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당시 박정희 정부는 몬트리올국제박람회 준비에 열을 올렸으며 신문들은 박람회 준비 과정부터 방문객들의 반응까지 세세히 보도했다는 사실을 겹쳐보면 하나의 가설이 제기된다. <손>이 유현목 감독의 개인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기 보다는 정부의 의뢰나 요청을 받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손>을 캐나다 몬트리올국제박람회라는 단서를 통해 보면, NFB로부터 국립영화제작소, 시네포엠, 유현목 감독까지 하나의 선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선은 박정희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캐나다 몬트리올국제박람회로 다시 연결되어 하나의 원을 그린다. 당시 정부는 몬트리올국제박람회를 위해 국보급 문화재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박서보, 김영주, 권옥연, 유영국과 같은 미술작가들에게 10여점의 작품을, 이상근, 백병동, 나운영과 같은 음악가들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건축가 김수근에게 한국관 설계를 맡겼을 정도로 세심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NFB로부터 국립영화제작소로 전달된 공문이 있는지 국가기록원을 통해서 찾아보았지만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애초에 1966년 10월 1일로 공지되었던 마감일을 넘기고도 출품이 가능했다는 점, 2년 동안 별다른 활동의 흔적이 없었던 시네포엠이 어느날 갑자기 다시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1966년에 시네포임이 제작했던 <손>은 전위적 단편영화가 아니라 전위적 문화영화로 지칭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정부의 의뢰 혹은 요청으로 <손>이 제작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이 가설의 입증은 현재로서는 직접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상당히 높은 개연성을 갖는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들을 더 모으는 수밖에 없다. <손>의 제작 배경에 정권의 흔적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이 작품에 어떤 가치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대로 워낙 단편적인 사실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실들로부터 <손>과 관련된 입체적인 지형을 그려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손>과 관련하여 아직 해결하지 못했고 검토가 남은 두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는 50초라는 상영 길이이며, 다른 하나는 유현목 감독이 언급하고 있는 영상주의의 문제이다. 상영길이와 관련해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애초에 50초 길이의 작품을 공모한 이유가 극장 뿐만 아니라 TV에서 상영될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1967년 몬트리올국제박람회는 사실상 영화 상영 포맷의 박람회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영사 기술들, 특히 다중영사 시스템들이 주목을 끌었다.[5] 이때 소개된 상영 시스템들은 영화가 TV와 경쟁하면서 점점 대형화되는 추세의 극단적 면모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50초 길이의 작품 공모를 통해서 대형화뿐만 아니라 일종의 TV 상영 실험으로서 컴필레이션 영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나서, 애초에 계획했던 바대로 TV 네트워크를 통해서 작품들을 방영을 했는지, 했다면 어떤 형식으로 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한 자료가 미비하여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확실해 보이는 것은 50초라는 길이로 작품을 공모한 이유가 TV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을 반영하고 있고, 이는 작품 모집 공고 요강에도 명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현목 감독이 <손>을 만들면서 TV 매체에 대한 고민을 실제로 했었는지, 했다면 어떤 식으로 작품에 반영했는지에 대해 추후에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른 문제는 유현목 감독이 언급하는 영상주의라는 개념이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이다. 이 개념을 파악하는 일은 당대의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들, 특히 문학과 미술에서 전위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와 같이 비교 연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검토해야 할 문제들이 상당히 많다. 사실 이 문제를 푸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이에 대한 설명 역시 추후로 미룬다. 여기서는 <손>과 관련된 형식의 문제에서 영상주의의 의미를 쉽게 풀어보고자 한다. 유현목 감독이 인터뷰한 대로 영상주의는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한 새 차원의 관념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의가 추상적이어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글에는 싣지 않은) 시네포엠 발족을 보도하는 『경향신문』 기사(1964.1.20)는 시네포엠의 목적을 “현실적 상황에 시와 「카메라」의 눈을 돌려 얻어진 「오브제」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 진술 또한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이다. 이 두 문장을 엮어보면, “현실적 상황에 주목하되, 그 상황의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여 시적인 오브제로 시각화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는 관념 세계를 구축한다” 정도가 될 것 같다.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를 쉽게 번역해보면 “현실적 상황(분단)에 주목하되, 그 상황의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여 시적인 오브제로 시각화하고(내러티브나 인과 관계 없이 대상을 클로즈업하여) 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는 관념 세계를(추상적 개념이나 상징을) 구축한다”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장을 다시 <손>에 대입하면 <손>은 “한국전쟁 혹은 분단에 주목하되, 다양한 손을 클로즈업해서 오브제화하고 이를 통해 반전, 평화, 인류 문명과 같은 상징을 구축하는 작품이다” 정도로 기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영상주의를 해석하는 것의 타당성은 유현목 감독이 <손>을 설명했던 『경향신문』 기사(1998.2.05)에서 시네포엠의 첫 번째 작품 <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모임이 결성되고 만든 첫 작품은 <선>이라는 15분짜리 16mm 영화였다.[6] 한국의 미를 상징하는 선들을 화면에 담았다. 경복궁 근정전, 초가집 지붕, 다듬이 방망이, 고무신, 여인의 옷소매, 가야금 등 모두 곡선들이다.” 그렇다면 <선>은 한국적 오브제라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을 클로즈업해서 곡선을 통해 한국의 전통을 상징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유현목 감독이 정의하는 영상주의는 클로즈업한 장면들이 내러티브 없이 나열되는 영화 정도로 풀어쓸 수 있게 된다. 개념의 모호함을 풀어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한 것이긴 한데, 중요한 것은 유현목 감독이 정의한 영상주의가 무엇이냐보다도 어떠한 요인들이 작용해서 영상주의라는 개념이 전위영화 혹은 실험영화와 등가를 갖는 개념처럼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이 문제 역시 추후에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손>과 관련한 사실들과 이로부터 추정할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고자 했고, 아직 풀어내지 못한 남겨진 문제들을 언급했다. 시네포엠과 두 편의 작품 <선>과 <손>을 부분적으로 언급할 뿐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주지 못 했는데, 이는 지면 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탓이 크다. 추후로 기약한 문제들을 지면이나 강연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갖겠다는 약속으로 양해를 구한다. 결론을 대신해서 시네포엠의 첫 작품 <선>의 소재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선>과 <손>이 유현목 감독의 공식 필모그래피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선>은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칸영화제나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출품될 예정이라고 했는데, 1964년과 1965년에 두 영화제 상영 목록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1963년에 유현목 감독은 <오발탄>으로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참석했었고 이것이 시네포엠을 설립하게 되는 직접적 동기가 되기 때문에, 나는 <선>이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출품은 되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하고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누군가의 집요한 노력으로 <선>의 소재 역시 조만간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1]  <손>의 제작년도는 1966년이며 공식 상영된 것은 1967년이기 때문에 이 둘을 병기하였다. 

[2]  큰 따옴표 안에 인용한 신문기사들은 띄어쓰기를 수정하고 한문을 한글로 표기하였다. 

[3]  이 글에서 직접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았지만, 시네포엠의 발족을 보도했던 신문기사까지 포함해서 나열하면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다. 시네포엠에서 제작했던 영화 장르를 지시하는 용어가 전위적 단편영화, 전위적 문화영화, 전위영화, 실험영화 등으로 다양하며, 실험영화는 사후적으로 언급되는 용어로 보인다는 점이다. 유현목 감독이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선>과 <손>이 제작되었을 당시에 신문기사에서 사용된 용어는 전위적 단편영화와 전위적 문화영화이다. 앞에서 환기한 바대로, 이 용어들이 서구의 실험영화와 동일한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열한 기사들로만 볼 때, 유현목 감독이 생각했던 ‘전위적’ 영화라는 개념은 그의 용어로 영상주의와 등가로 보인다. 유현목 감독이 인식했던 실험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영상주의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4] <손>과 관련된 자료를 찾던 중에 마침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석사과정 학생인 정이아 씨가 밴쿠버에 갈 일이 있어서 그곳의 대학 도서관이나 벤쿠버 시네마떼크에서 몬트리올국제박람회 혹은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카탈로그가 있는지, 있다면 <손>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지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대학 도서관에 있는 몬트리올국제박람회 카탈로그에서는 <손>이라는 제목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이아 씨가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내게 중요한 힌트를 주었는데, “인간과 그 세계” 경쟁을 영어로 “Man and His World”로 검색하지 않고 불어로 “Concours terre de hommes”로 검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손>의 소재를 알게 된 데에는 정이아 씨의 도움이 컸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5] 이에 대한 연구로는 Monika Kin Gagnon and Janine Marchessault, Reimagining Cinema: Film at Expo 67,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14를 참조. 

[6] 16mm 포맷에 대한 언급은 유현목 감독의 기억 오류이다. <선>은 35mm 흑백으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