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불화(不和)하는 말과 풍경 사이에서

CRITIQUE

역사, 불화(不和)하는 말과 풍경 사이에서
: 임흥순의 영상작업에 대한 노트

유운성


<비념 Jeju Prayer>(2012)


카메라로 풍경을 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풍경이란 것이 그 자체로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포토제닉’하거나 압도적이어서 종종 서사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내세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흔적이 거의 없거나 완전히 소거된 무인의 풍경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말하자면 풍경이란 본질적으로 탈-이야기, 탈-역사를 스스로의 순정(純正)을 위한 조건으로 삼는 까닭에, 이를 이야기 혹은 역사와 함께 다루는 일은 상당한 주의와 노력을 요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풍경은 작가가 특정한 시기를 대하는 감정과 무드를 온전히 끌어안은 정동적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허우샤오시엔, 라브 디아즈, 임권택의 경우), 모종의 담론적 전략을 통해 역사적 시간의 주름 혹은 층이 켜켜이 쌓인 지질학적 대상으로 전화되기도 하는 것이다(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라우브, 안토니우 레이스와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 니콜라 레의 <안더스, 몰루시아>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두 역사적 시간 ‒ 제주 4.3사건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 ‒ 을 한데 아우르고 있는 임흥순의 <비념>(2012)은 풍경 이미지가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는 에세이 영화다. 여기서 그가 풍경을 다루는 방식은 다소 특이한데, (역사(적) 영화에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풍경을 정동적 혹은 지질학적 대상으로 전화시키기보다는 풍경의 탈-역사성, 즉 어떠한 인간사에도 무심한 자연의 냉정한 아름다움 자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념>만큼 풍경 이미지가 지배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위로공단>(2015)의 풍경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임흥순 감독과의 대담자리에서 <비념>의 풍경들은 영화적으로는 꽤 이상한 방식으로 ‒ 무엇보다 몽타주의 논리를 뚜렷이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 제시되고 있는데도 이들이 기어이 영화적 풍경으로 성립되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말의 힘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짐작만으로는 어쩐지 불충분해 보인다.


<위로공단 Factory Complex>(2014/2015)


말 없는 풍경

<비념>과 <위로공단>을 열고 있는 이미지들을 떠올려 보자. (<비념>의 경우, 짧은 퍼포먼스 장면이 도입부에 삽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둘 모두 무인의 자연풍경이나 폐허의 광경을 담은 이미지들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강고하기 짝이 없는 풍경의 침묵으로, 그 침묵의 강고함이란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이나 바닥에 떨어진 맑은 주황색의 귤이나 가까스로 인간의 흔적을 암시하는 눈 위의 발자국 같은 작은 시각적 교란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할 만큼 큰 것이다. 임흥순의 영상작품에서 풍경은 관상(觀賞)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이고 그렇다고 해서 압도적인 숭고로 우리를 휘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적과 공백 이외에 아무 것도 겨냥하지 않는 순수한 풍경, 그 절대적인 냉담함과 무심함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풍경이다. 이러한 임흥순의 풍경이 가장 극단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시각화된 사례는 (과연 이것을 하나의 풍경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접시>(2011)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백색의 벽일 터인데, 화면 왼쪽을 가로지르는 얼룩과 (화면 바깥에서 접시를 던지는 여성들에게 일종의 과녁이 되고 있는) 십자표시 테이프는 말하자면 저 작은 벌레들이나 바닥에 떨어진 귤이나 눈 위의 발자국과 같은 일종의 시각적 교란으로서, 이는 임흥순이 순수한 풍경이 지속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감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음을 일러주는 징후가 되고 있다. 풍경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그것의 지속은 더더욱 두려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나아가 역사란 풍경의 중단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접시 Flying Plate>(2011) [영상보기]


풍경 없는 말

그리하여, 다른 한편에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있다. <나는 접시>에서 벽으로 날아드는 접시와 더불어 제시되는 (화면 밖) 여성들의 떠들썩한 수다 같은 크고 작은 소란 없이 임흥순의 풍경이 시종일관 독자적으로만 지속되는 법은 없다. 임흥순의 영상작품에서 만일 어떤 풍경이 그 자체로 스스로의 존재를 과시하며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그에 필적하는 소란이 언제 어딘가에 있었던/있는/있을 것임을 짐작하게 되며 – 가령, 4.3사건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와 고공농성 중 목숨을 끊은 금속노조한진중공업 지회장 김주익에게 헌정한 ‘풍경영화’ <긴 이별>(2011)을 떠올려 보라 - 그 소란이 현시될 순간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된다. 말하라, 역사가 온전히 풍경에 삼켜지지 않도록,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라. 


<긴 이별 Long Goodbye>(2011)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그의 영상작품에서 듣게 되는 것이, 능숙한 인터뷰 연출을 통해 얻어진 자연스럽고 솔직한 말들이라기보다는 종종 영상 제작 환경의 장치(dispositif)가 인물들과 상호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는 ‘가공된’ ‒ 어느 정도는 (인터뷰어가 아닌) 인터뷰이가 연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 말들이라는 점이다. 감독의 가족이 9년간 살던 지하 월세방을 떠나 임대아파트로 옮기는 과정을 담은 <내 사랑 지하>(2000)나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면서 기분 좋게 조롱하는 <나는 접시>의 인물들이 자유분방하게 내뱉는 말을 이런 사례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위로공단> 전후에 만들어진 영상작품들에서 말과 장치의 관계는 아주 뚜렷해 보인다. 이 가운데 <북한산>(2015)은 장치와 인물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임흥순은 남한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탈북여성 김복주가 북한산 원효봉을 오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을 롱테이크 촬영으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녀의 말은 무선마이크를 통해 세심하게 녹음되었는데 산을 오르면서 점점 숨이 가빠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듣고 있는 것은 하나의 증언이기도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대상인 동시에 탈북자를 ‘연기’하는 김복주의 ‘픽션’이기도 하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그것은 북한산을 실제로 오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를 실시간으로 기록한다고 하는 영화적 장치의 구성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는 증언-픽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위로공단>에서 여러 인물들이 들려주는 말을 일종의 구술이나 증언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말들이 (인터뷰라는 상황을 구성하는) 영화적 장치에 대한 상이한 언어적, 신체적 반응에 대한 도큐먼트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인터뷰이가 들려주는 말의 진부함을 작품을 비판하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장치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 말들은 풍경과 불화하는 말들이다. 풍경의 자연스러움과 대비되는 인공적 느낌, 고요에 맞서는 소란이야말로 이 말들의 힘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항의집회를 벌이는 이들이 일으키는 소란과 마찬가지의 강도로, 혹은 그보다 훨씬 강도 높게, 말들은 풍경과 불화하며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임흥순 영상작업의 정치학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북한산 Bukhansan>(2015)


역사, 말과 풍경의 불화

임흥순의 영상작업에서 이야기가 솟아나고 역사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풍경과 말의 불화를 통해서다. 그의 작품에서 역사는 정동의 풍경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며, 장소의 지질학을 통해 파악되는 것도 아니며, 증언의 말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말과 풍경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무엇이다. 이런 불화와 어긋남은 <환생>(2015)과 <교환일기>(2015)에서는 완전히 전면화되어 있다. 특히 일본의 아티스트 모모세 아야와 임흥순이 주고받은 여섯 개의 단편(혹은 시청각적 ‘일기’)들로 구성된 <교환일기>는 직접적으로 역사적인 이슈를 건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말과 풍경의 불화라고 하는 전략이 전면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각각의 작가는 5~6분 정도의 단편영상을 만들어 상대방에게 보냈고 이를 받은 이는 영상을 본 후 자신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그 위에 더해 다시 돌려보내는 식으로 ‘교환일기’를 만들어 나갔다. (임흥순 작가의 말에 따르면 모모세 아야와의 이 공동작업을 조금 더 계속해 작품을 확장할 계획이라 한다.) 이때 각각의 내레이션은 어느 정도는 영상에 담긴 사물이나 사건에 의해 촉발되고 부분적으로 그것들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종 어긋나고 전적으로 독자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명의 작가가 개인적인 방식으로 성찰하는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역사적 평면을 이따금 스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불화를 통해서다. 어쩌면 <비념>의 풍경들을 가로지르던 기이한 (탈-)몽타주의 논리를 이해할 단서를 여기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임흥순에게 있어 몽타주란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몽타주란 여러 시청각적 요소들을 넘나들며 만나고 충돌하는 말과 풍경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와 결부된 역사는 재현되기보다는 발생하는 무엇으로서 체험된다. 


<환생 Reincarnation>(2015)


※ 이 글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마련한 제10기 비평워크숍(2016.9.27~10.1)을 위해 준비한 발제문을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