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위에서 되살리기: 남화연 개인전 《마음의 흐름》

REVIEW
2020.5.4 OKULO online exclusive


흐름 위에서 되살리기
남화연 개인전 《마음의 흐름》

강소정


2020년 3월 24일부터 5월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남화연의 개인전 《마음의 흐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일제 식민시기에 태어난 조선의 무용가 최승희(1911-1969)를 다루고 있다. 남화연은 2012년부터 무용가 최승희를 주목해왔다. 현대무용과 전통무용에 모두 능했던 최승희는 일본과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 북미, 남미 등지를 순회하며 수많은 공연을 했다. 그는 고전 무용의 현대화를 이끌고 조선민족무용의 근간을 세워 ‘동양춤’을 완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은 이후, 친일을 했다는 의혹과 월북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남한사회에서 오랫동안 온전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빈약한 자료에 더해 금지된 존재로서 최승희는 근대 한국 춤의 신화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에게 최승희의 춤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일은 매혹적이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남화연에게 최승희는, 그리고 최승희의 춤은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을까? 혹은 최승희를 통해 남화연은 어떻게 자신의 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최승희에 대한 남화연의 오랜 여정을 정리하는 이번 전시는 여섯 점의 영상 작업을 비롯하여 설치, 아카이브 자료,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제목인 《마음의 흐름》은 두 장의 사진과 한 편의 짧은 평론으로만 남아있는 최승희의 안무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남화연은 2014년 이미 이 안무의 동선을 상상해서 그린 드로잉과 사운드, 포스터로 표현한 작품 <마음의 흐름>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제목은 이번 전시에서 설치 작품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2층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천장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오른편 창가 위에서 때때로 켜지는 붉은 조명으로 시작하는 작품인 <마음의 흐름>은 전체 전시의 입구가 된다. 가벽을 따라 본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작품은 다시 거울처럼 천장을 비추는 바닥의 설치물과 전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점등되는 붉은 조명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흐름>은 최승희의 춤을 재현하는 대신 안무의 이름만으로 그것을 지시하며, 독자적으로 기능하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 작품은 어떻게 부재하는 최승희의 안무, 마음의 흐름이라는 지각 불가능한 대상과의 관계를 보여주는가? <마음의 흐름>은 같은 층에 전시된 <사물보다 큰>과 함께 최승희와 접속하기 위한 남화연의 예술적 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네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영상작품 <사물보다 큰>이 있다. 이 작품은 남화연이 일본에 거주하는 동료 히로후미와 바다를 주제로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띤다. 먼저 히로후미가 네 번의 편지를 쓴다. 그의 내레이션이 일본의 즈시 해변에서 나날이 다른 풍경들을 기록한 영상들 위에 겹쳐진다. 정지된 이미지가 있는 네 개의 스크린 중 가장 왼쪽의 스크린에서 영상이 재생되다가 정지화면이 되고나면 바로 오른편에서 다른 영상이 재생된다. 복수의 스크린을 순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바다의 풍경을 바꿔놓는 시간의 흐름을 위치의 변화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히로후미의 편지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날, 히로후미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바위 위에서 바다를 보고, 다시 멀리서 해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둘째 날, 그는 해가 쨍쨍한 해변에서 우연히 근처 영화관의 주인을 만나고, 해양생물들이 박제된 박물관에 방문한다. 그리고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셋째 날에는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해변이 보인다. 날씨는 맑지만 바다색은 혼탁하며 물속엔 생물 대신 물건이나 껍데기가 많다. 히로후미는 파도가 밀려오는 방파제를 위태롭게 건넌다. 마지막 날, 바다는 은빛으로 빛나고 해변에는 여러 물체들이 흘러들어온다. 스티로폼 조각 하나가 굴러와 바닥에 있던 카메라 렌즈를 가린다. 오랫동안 바다를 부유한 장갑 조각에는 해초가 자리를 잡았다. 히로후미는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던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모래사장 위에 세운다.

그런데 영상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화면에서는 이야기에 대한 히로후미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히로후미는 수영하는 자신의 신체, 우연히 만난 친구, 박물관의 전시물 등을 손에 든 카메라로 기록하는 시선의 주체, 이야기의 화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또한 해변이나 박물관을 찍은 장면에서 프레임 안에 등장해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등장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때 화면 속 히로후미의 손에는 카메라가 없다.) 따라서 풀쇼트로 해변 풍경을 담은 장면은 그것이 히로후미의 시선인지 카메라의 시선인지 결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히로후미는 외화면 사운드에 있어서는 화자이지만 화면영역에서는 화자와 등장인물의 자리를 옮겨 다니는 존재다.


남화연, <사물보다 큰>, 2019~2020, 4채널 영상, 25분 47초, 사진: 김익현 (아트선재센터)


이에 대한 남화연의 답장은 다른 형식을 취한다. 화면은 19세기 화가 쿠르베가 그린 파도 그림을 가까이에서 움직이며 보여준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 부여된 영상들이 네 개의 스크린을 모두 채우고 나면 파편적인 인상들과 기억들을 나열하는 그의 내레이션이 겹쳐진다. 내레이션은 천사를 보여주어야 그릴 수 있다고 말했던 쿠르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또 그는 얼마 전 박물관에서 본 어떤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먹으로 스케치한 그림의 빈 공간에는 바다의 색을 기억하려고 기록한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각 가능한 대상만을 그린다는 쿠르베의 태도와 지각된 대상을 문자로 가리키고 있는 바다 그림. 남화연의 편지는 그가 최승희를 대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그는 스케치에 남겨진 글자를 통해 색을 채우는 대신 오래 전 정자에서 바다를 바라보았을 사람들을 상상한다. 파도가 솟아오르는 동안 바다의 깊은 바닥에는 천년이상 된 오래된 물이 가라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 바다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관계를 가능케 한다. 쿠르베의 파도가 단 한 번 솟아오른 사건인 것처럼 최승희의 춤은 단 한 번 흘러간 몸짓이다. 우리는 여전히 바다를 마주할 수 있고, 춤출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다. 이 잠재성의 영역은 우리를 부재하는 사건들과 접속 가능케 한다.

한편, 남화연이 정자에서 바다를 보았을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동안, 화면에는 어떤 변화가 발생한다. 스크린 하나에 해변을 배회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히로후미의 모습이 나타난다. 앞서 히로후미의 편지에서 그에게 화자와 등장인물의 역할이 뒤섞여있었다면, 남화연의 편지에서는 남화연의 들려주기와 히로후미의 보여주기가 뒤섞이게 된다. 두 작가의 접속은 이런 뒤섞임의 양태로 나타난다. 3층에서 상연된 퍼포먼스 <에헤라 노아라>는 이런 뒤섞임의 또 다른 예일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최승희가 일본에서 처음 선 보인 조선 춤으로, 최승희는 남자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춤추었다고 한다. 남화연의 작품에 등장한 여성 퍼포머는 남성을 연기하지 않는다. 대신 최승희에 대한 한 평론가의 말, 스승 이시이바쿠의 말, 그리고 최승희 자신의 말을 차례로 발화하며 춤을 춘다. 퍼포머의 몸은 이 목소리들이 뒤섞이는 접촉 지대가 된다. 이처럼 남화연이 최승희와 관계 맺는 방식은 잠재성의 영역에서 주관과 객관, 복수의 목소리들을 뒤섞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접속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전시에서 선보인 영상작품들 대다수가 최승희의 안무명을 그대로 가져온 데 반해, 남화연이 고안한 제목이라는 점에서 <사물보다 큰>은 자못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제목처럼 보인다. 사물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히로후미의 영상에서 파도 위를 떠다니는 사물들을 떠올려보자. 그 중 버려진 장갑 하나는 원래 그 사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대신 다른 생명체가 자라는 조건으로서 새로운 삶을 산다. 바다의 흐름이 떠도는 사물들에게 부여한 것이 바로 ‘사물보다 큰’ ‘사후의 삶’이다. 벤야민은 ‘번역’이야말로 원작이 그 삶 이후에도 ‘사후의 삶(afterlife)’을 사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 바 있다(「번역자의 과제」). 남화연의 작업은 최승희를 번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남화연은 갑판 위에 서 있던 최승희를 본 기억의 기록을 이야기한다. 격동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특정한 주체성들을 부여받았던 최승희는 사실 항해를 좋아하는 근대적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그녀를 과거에 부여받은 주체성들로부터 벗어나 다시 되살리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남화연은 최승희가 쓴 『조선민족무용기본』이 일본의 조선학교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최승희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최승희라는 조건 속에서 포착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최승희를 변하게 한다. 최승희를 현재로 되살린다.

마지막으로, 전체 전시 제목과 동명의 설치 작품 <마음의 흐름>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 영상작품 <사물보다 큰>과 맺는 관계를 생각해보고 싶다. 먼저, 그것은 <사물보다 큰>을 보는 관람객의 의식에 개입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들리는 사운드는 영상에서 두 작가의 내레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스러운 ‘배경’ 음악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히로후미의 편지에서 남화연의 편지로 넘어가는 전환의 시간 동안 내레이션이 부재하게 되면, 이 사운드는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관람객의 주의를 전시장의 물리적 공간으로 불러낸다. 이처럼 관람객의 주의를 스크린의 바깥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장치는 스크린 뒷면의 빈 공간을 간헐적으로 비추는 천장의 붉은 조명이다. 이 조명은 관람객이 스크린의 비가시 영역에 주목하게끔 이끄는데, 그것은 영화적 외화면이 아니라 스크린이 위치한 공간의 비가시 영역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음의 흐름>을 이루는 사운드와 조명은 영상작품을 향한 관람객의 주의를 습관적 비가시 영역, 작품의 물질적 조건으로 향하게 한다. 


남화연, <마음의 흐름>, 2020, 사운드‧설치‧복합매체, 사진: 김익현 (아트선재센터)


평평한 사각형의 바닥 설치물은 조금 더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것 또한 거울처럼 전시장을 비추면서 습관적 비가시 영역을 지각하게 이끈다. 또한, 그 표면은 크게 선명하거나 고르지 않아 반영을 왜곡하는 결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서는 히로후미가 보여준 어느 날의 은빛 바다가 연상되기도 한다. 즉, <마음의 흐름>은 <사물보다 큰>에 대하여, 관람객의 주의를 바깥으로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작품 속 세계를 전시장의 물리적 공간으로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치물 위쪽의 붉은 조명이 켜지면, 그것은 마치 화려한 조명 아래의 댄스플로어처럼 보인다. 그 위에서 퍼포먼스는 발생하지 않으므로 이 이미지는 부재하는 퍼포머 최승희에 대한 은유가 된다. 이처럼 ‘마음의 흐름’은 그것이 맺는 관계에 의해 서로 다른 의미들을 형성하는 잠재적 사물, 흐름 위의 사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