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INTERVIEW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 <내 친구 정일우>(2017)로 돌아온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대담 진행 안건형(다큐멘터리 감독)
대담 정리 및 사진 예그림(『오큘로』 편집진)



※ 아래는 신작 다큐멘터리 <내 친구 정일우> 후반작업 중인 김동원 감독을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의 안건형 감독이 만나 나눈 대담 기록 가운데 일부이다. 대담은 2017년 5월 7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대담은 <내 친구 정일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김동원 감독의 영화 경력 전체를 되짚어 보는 데로 나아갔다. 아래는 전체 대담 기록 가운데 3분의 1 가량으로 대담 전체는 『오큘로』 제5호(2017년 여름호)에 수록될 예정이다. <내 친구 정일우>는 2017년 6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관찰과 개입」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6월 21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상영 이후에는 시네토크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내 친구 정일우> 편집 중인 김동원 감독


안건형 이번에 새로 작품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감독님 작품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거의 10여 년 만에 작품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동원 보면 실망할 거 같은데… 일반 관객을 위해서 만드는 영화도 있지만 이번 영화는 헌정한다는 느낌으로 만든 것이거든. 돌아가신 정일우 신부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1차 관객이지. 2차 관객은 물론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본다면야 좋겠지만 1차 관객과 2차 관객 사이의 격차가 이번에는 좀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주인공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많이 관심 있어 할 거고 모르는 사람들은 김동원이 이제 종교 영화도 만드나 생각할 수도 있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니까 좀 더 확실해진 생각인데 나는 교수로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이 못 되는 것 같아.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자꾸 핑계를 찾는데 학교에 일이 있으면 그걸 핑계 대고 안 하기가 쉽고, 또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 거기서 풀려나오면 다시 몰두하기가 힘든 성격이라… 교수직 그만두고 이번에 쭉 놀면서 몰두하니깐 신도 나고 작품도 진행이 잘 되는 것 같아. 10년 동안 뭘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기가 약간 힘들었거든. <상계동 올림픽>(1988)과 <송환>(2003)의 속편 작업도 하려 했는데, <상계동 올림픽>은 나한테도 동력이 부족한데 등장인물들도 동력이 떨어져서 중간에 덮게 되었고, <송환>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중심인물이었던 분의 기운이 점점 약해져 가니깐 활동이 줄어들고 촬영할만한 기회들도 자꾸 없어지고, 그러다가 기획을 키워서 북한에 가는 제안을 받아서 준비하고 있다가 그것도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고… 자빠진 김에 쉬었다 가자고 해서 그냥 놀았지 뭐.

안건형 이번 작품은 어떤 내용인지 말씀 부탁드릴게요.

김동원 나한테 스승인 분이 두세 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일우 신부가 그 중 한 분이야. 나랑 시간도 많이 보내고 이야기도 많이 했던 분이거든. 3년 전에 돌아가셨어. 상계동에서 3년 동안 같은 텐트에서 동침했던 분이지. 존경한다기보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분, 아니 존경도 하지만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그분이 서강대학교 교수로 오셨다가 청계천에 양평동을 거쳐 복음자리마을을 만들고, 또 상계동에 가서 3년 동안 계셨고, 괴산 시골로도 가셔서 8년 동안 계셨는데 거기 있는 분들도 다 나같이 그분을 좋아했어. 한군데 머무는 분이 아니라 웬만큼 계시면 떠나는 노마드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완전하게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도 3년간 같이 지냈지만 내가 아는 것도 부분적이고 그 분의 다른 삶에 대해서도 궁금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조사를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봐야 했지. 이번 작품은 크게 네 부분, 조금 더 크게 얘기하면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어. 결국 조금밖에 못했지만… 미국에 있는 가족들 이야기, 서강대와 예수회 이야기, 복음자리마을 이야기, 상계동 이야기 그리고 괴산이지. 정일우 신부 곁에 가깝게 계시던 분들이 그분에 대해 증언하면서 편지를 띄우는 형식으로 구성을 하자는 게 원래 아이디어였는데, 글쎄, 한 절반 성공하고 절반 실패했다는 생각이 드네. 처음에 이런 구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는 신부님과 나누었던 내밀하고 깊은 교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자료가 제한적이어서 옛날 사건들을 영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도 어려웠어. 정일우 신부의 행적에 관한 설명이 좀 많다는 생각도 들어. 행적이 60프로면 좀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이 40프로 정도는 나와 줘야 하는데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야.

안건형 10년간 교수로 재직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만든 작품이 본인의 스승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도 흥미로워요. 스승을 다룬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감독님의 작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굴곡진 역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감독님 본인이 내가 이 사건, 이 상황, 이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질문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들이죠.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이번 작품도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특히 정일우 신부님은 <상계동 올림픽> 시기부터 감독님 인생의 향로를 결정한 분이라는 점에서 이번 다큐가 몹시 기대돼요. 신부님에게 가장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김동원 글쎄, 그분이 나한테 뭘 가르친 건 없고 그냥 옆에 있으면 따라 배우게 되는 그런 분이었지. 그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정일우 신부님은 존재 자체가 선생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 굉장히 좀, 뭐라 그럴까, 내가 볼 땐 완벽한 사람 같아. 너무 완벽해서 작품으로 할 때는 힘든 면도 있었지. 계속 낮은 곳으로 다니면서도 절대로 심각하지 않고 언제나 웃고 명랑한 그런 분이었어. 게다가 영성, 말하자면 내공이 엄청 세서 신앙의 깊이를 다른 사람들은 가늠하지 못 할 정도였거든. 김수환 추기경이 자기보다 어린 신부한테 영적 지도 신부로 청할 정도였으니깐. 원래 이름이 존 데일리인 외국인이었는데도 말이야. 그리고 나도 피정 지도도 받아보고 그랬지만 보통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놓기 힘든데 그분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술술 나오는 게 정말 무장해제 시키는 재주가 있다니까. 정일우 신부가 영성지도를 하면 예수회 후배들뿐 아니라 전국의 교구 신학생들까지 와서 그분에게 지도를 받았어. 그분이 지방에 내려가기도 하고. 완벽하지. 훌륭한데 욕도 잘하고 음담패설도 잘 할 정도로 열려있는 사람이었고. 영화 초반에 나오지만 어렸을 때부터 ‘재밌는 녀석(fun guy)’이었다고 그러잖아, 그 초등학교 친구가. 세상에 그 녀석을 싫어하는 사람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럴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특출했던 것 같아. 좋은 캐릭터를 타고난 거 같은데 물론 완벽하다는 것이 다른 사람과 싸우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완벽하다는 거야. 정말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지. 그런 분이 돌아가실 때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어. 치매도 아주 지저분한 치매에 걸려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원래 보여줬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니깐 사람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 나도 그분 편찮았을 때 병문안을 몇 번 갔는데, 가려면 간호하는 예수회 신부들한테 꼭 허락을 받아야 했어. 전화로 내일 가도 되냐고. 와도 된다고 해서 가면 문 앞에서 안 본다고 가라고 해. 기분이 십분 사이에 변하기도 하고 한말 또 하기도 하고, 같은 예수회 신부들도 못 참아서 제발 병원으로 보내자 할 정도로 힘들게 했던 것 같아, 주변 사람들을. 그런 거 보면서 특히 종교 믿는 사람들은 이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생각에 빠졌던 거 같아. 과연 하느님이 이 신부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나 그런 질문들을 엄청나게 했겠지. 며칠 전 시사회 할 때 예수회 안에서도 시끄러웠대. 내가 나름대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한 게 보인다면서 그 부분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예수회 신부들 중에서는. 그러니깐 정말 미스터리지. 그렇게 정말 완벽한 양반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돌아가신 게 미스터리지. 




안건형 상계동 당시에 특히 감화를 받거나 저런 모습을 보고 배워야겠다 하는 것이 있었나요? 

김동원 미사 때 하시는 말씀이 꼭 맞는다고 할 순 없지만 너무나 확신 있고 진정성 있게 이야기를 하시기 때문에 미사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는 아주 거리낌 없는 모습에 감화를 받았지. 화투 치다 잃으면 “썅!” 하고 그런 것들… 그런 게 너무 재밌는 거지. 싫어할 만한 구석이 사람들한텐 다 있는데 이 양반은 그런 게 없었어. 담배 안 피우는 사람들은 그분이 줄담배 피운다고 싫어했을지 모르지만 나도 담배 많이 피우고… (웃음) 술 담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한테는 너무 좋지 뭐. 불교로 치면 땡중 같은 느낌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 반사회적 활동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 양반은 굉장히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어. 상계동에서는 철거용역한테 막 덤비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런 모습도 재밌었어. 그러다가 철거 끝나면 혼자 구석 가서 울기도 하고, 그런 모습들이 너무 인간적이었다고 느껴졌어. 내가 들은 것 중에 제일 감동적인 이야기는 똥 푸는 임씨에 대한 거야. 제정구씨 신혼 때 이야기인데 제정구씨 부부랑 정일우 신부랑 셋이 같이 살았거든, 판자촌에서. 정신부가 작은방에 살고 둘이 큰방에서 살고 그랬대. 어느 날인가 동네에서 똥 푸는 임씨라는 사람이 완전히 만취해서는 진흙탕에 쓰러져 있는 걸 밤에 신부님이 데려와서 씻기고 재웠다는 거야. 그런데 보통 하루 정도는 그럴 수 있는데, 제정구씨 부인 이야기로는 임씨를 그렇게 4년인가 5년인가를 데리고 살았대. 매일 씻겨 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는 거야. 정일우 신부를 모르는 사람이래도 ‘신부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어요?’ 이러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니까. 보통은 이야기를 듣다가도 한 시간 지나면 지겨워지고 오늘은 그만하자 그러기 쉬운데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거야, 이 양반은. 나도 상계동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내가 이야기하다 지친 적은 많지만 신부님이 먼저 그만두자고 한 적은 없어.

안건형 정일우 신부님의 매력을 이해하려면 결국 작품을 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네요. 편지를 쓴 네 분의 내레이터는 어떤 분들인가요?

김동원 예수회에 정일우 신부 육촌 신부가 있길래 그 신부한테 부탁할까 하다가 나이가 좀 있어서 정일우 신부에게 영향 받은 젊은 신부를 추천해 달라고 했지. 그렇게 추천받은 수사님이야. 그런데 그 수사님이 예수회라 그런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별로 안 썼어. 그리고 괴산에서 같이 산 거 외에는 특별한 관계가 없더라고. 예수회 이야기는 여러 사람 이야기를 종합한 걸로 했지. 예수회 신부들이 정일우 신부에 대해 쓴 책이 있는데 그 내용을 취합해서 수사가 쓴 것처럼 했어. 이미지로 표현 가능한 내용들을 골라서 썼지. 한국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분은 제정구씨고, 복음자리 공동체 할 때 같이 살던 열댓 분, 상계동 가기 전까지 같이 산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정구씨 부인을 화자로 택했어. 제일 애정이 많은 분이기도 했고, 정일우 신부한테. 그런데 아까 들려준 임씨 이야기 같은 것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애니메이션을 넣을까 생각도 했는데… (웃음) 남아있는 옛날 사진이 없다 보니 표현하기가 힘들었어. 내가 특히 관심이 있던 게 복음자리에서 열댓 명이 같이 한집에서 살았던 거였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수녀도 있고, 결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 할머니, 꼬마까지 다 있었는데 말이야. 그 이야기를 잘 표현하고 싶었는데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공동체 때 사진이 없으니깐 또 너무 민감하게 들어가기가 그렇더라고. 갈등을 꺼내 보이고 싶은데 이쪽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쪽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결국 감당이 안 돼서 그만뒀지. 그 이야기는 글로 쓴다면 쓸 만할 것 같아. 그 안에서 살던 사람들과 바깥에서 공동체를 보는 시선이 다르고 또 바깥에서 보는데도 여러 시각이 있고 말이야. 신자와 비신자가 같이 살고, 돈 버는 사람과 못 버는 사람이 같이 살고, 그런 식으로 5년을 산 건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거기서 같이 살던 사람들을 거의 아는데, 힘들었지만 일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고들 그래. 하지만 지금 하라면 못할 것 같다고, 그렇게 이야기들을 하더라고. 복음자리 마을을 만든 때가 정일우 신부 삶에서 피크였지. 그때가 정일우 신부가 3, 40대였을 때인데 제일 활동도 많이 하고 전성기였을 때지. 상계동 때도 전성기의 끝 무렵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상계동 때는 끝이 안 좋아서… 복음자리에서는 끝이 올라가는 거였는데 상계동에서 가라앉은 거지. 괴산에서는 아주 조용한 생활을 하셨어. 상계동 부분은 내가 내레이터를 맡았고 괴산 부분은 김의열이라고 내 서강대학교 후배가 맡았어. 촌놈이라 내레이션 녹음 때 고생 많이 했지. (웃음) 


* 이후의 대담 기록은 『오큘로』 제5호에 수록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