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과 곡예사의 줄타기를 생각하면서

REVIEW

벼룩과 곡예사의 줄타기를 생각하면서

: 장영혜중공업과 박보마의 전시, 그리고 전소정의 작업에 대한 단상


이한범 / 『오큘로』 편집동인



0.
프루스트의 소설에 대한 베케트의 산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기억과 습관은 시간이라는 암이 가지고 있는 종양이다.”[1] 프루스트에게 있어서 삶과 작품이 기억과 습관에 의해 구조로 세워지는 것이라면, 저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는 기억과 습관을 가로지르며 시간을 널뛰게 하는 특권적인 것이었다. 베케트는 프루스트의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물리적인 세계의 즉각적이며 우연적인 자각의 섬광”의 불완전한 목록을 제시하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면 “본질적인 것보다는 매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본질 전체”를 되살리는 “부차적인 반사의 예”인 것이다. 이를 통해 베케트는 프루스트의 소설이 시간을 구조화함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파괴하는 이중구조, 끊임없이 물러나고 진동하는 장소라고 읽는 듯하다.    

1.
찬바람을 뚫고 보았던 최근의 몇몇 전시에 대한 기억 중에서 무엇보다 강렬한 것은 아뜩한 향수 냄새다. 이는 우연히 겹쳤을 전시 기간 이외에 그 어떤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두 개인전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장영혜중공업, 아트선재센터)과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박보마, 아카이브봄)에 대한 얘기다. 한 곳에서는 한국의 대기업, 정계,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텍스트가 무한히 반복되었고, 다른 한 곳에서는 유리와 거울과 알 수 없는 사물의 파편들, 그리고 윤곽선만 남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찬 공기와 뒤섞여 진동하는 향수가 매혹적이긴 했지만, 내가 이를 계속해서 상기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관람 경험만으로 수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냄새는, 프루스트의 소설에서처럼 전적으로 그것만의 기능으로써 다른 시간을 내어주진 않았지만,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업들과 맞물리며 ‘이 때’가 아닌 ‘저 때’를 상상하게 만든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All Unhappy Families Are Alike>
(장영혜중공업, 2016, 아트선재센터 전시 사진)

  
2.
장영혜중공업의 개인전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을 보기 위해 표를 끊을 때 전시와 관련된 짧은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 일곱 점을 선보이는데, 세 개는 본관의 각 층에서 프로젝션되는 2채널 영상작업이며, 한 개는 표를 끊을 때 받을 수 있는 미색 종이 인쇄물, 두 개는 건물 앞뒤 외벽에 설치된 대형 배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트선재센터의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가 텍스트의 콘텐츠로서 주목받아왔다면, 오히려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어디에나 달라붙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텍스트 그 자체였다.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그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적으로 섬세하게 예비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플래시 영상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형식은 그들이 아주 오랜 시간 반복해오며 유지한 작업방식이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업을 해 왔었지만, 언어의 차이를 막론하고 영상 속에서 사용되는 텍스트의 최소단위는 단어다. 하나의 음에 맞춰 하나의 단어가 순간적으로 화면에 튀어 오르며 문장을 완성해나갈 때 그 사실은 명백해진다. 하나의 단어보다 긴 단위로 화면이 채워지더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자간을 의도적으로 넓혀놓았기 때문에 단어와 그 다음 연속된 단어가 시각적으로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이 최소단위를 보여주는 방식(속도와 크기, 색, 기울기 등등)은 다르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단순히 최소단위를 어느 수준에서 몇 개까지 합치느냐이지 의미론적으로 말이 되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즉 그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임의적인 규칙을 통한 텍스트의 드러남 그 자체다. 텍스트가 전달하는 내용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님에도 가볍게 휘발되어버리는 이유다. 텍스트는 단지 매개되어 드러나는 데 그칠 뿐이고 그것이 닿고자 하는 장소는 매우 불분명해 보임과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듯한데, 그 때문에 의미는 심지어 부차적인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관점을 바꾸어 보자면, 이는 인위적인 서사가 증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텍스트라는 형식에 달라붙어 여기저기에 흩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은 웹이라는 환경에서 보다 능수능란하다. 텍스트를 실어 나르는 물적 기반 중 웹 페이지만큼 광범위한 동시 접속을 가능케 하고 거리를 소멸시키며 불특정다수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넷아트의 태동기에 등장한 장영혜중공업이 상상한 급진성이 바로 이러한 특성이었을 것이지만,[2] 그 맥락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암시는 이 모든 것들을 매우 간단히 무화시킬 수 있는 장치이다. 종이는 쉽게 구겨서 버릴 수 있고, 전시장의 영상은 잠깐 보다가 자리를 뜰 수도 있다. 건물 외벽의 배너는 쉽게 눈에 띄지만 구태여 쳐다보지 않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접속할 수 있는 웹페이지 또한 마음만 먹으면 창을 닫거나 빠져나갈 수 있다. 때문에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노골적인 사회비판이나 네트워크화된 상호작용에 방점을 찍는다기보다는, 무한히 증식 가능한 서사를 포함하는 시스템을 조절하는 조건들을 세심하게 따져보는 것으로 읽힌다.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에서 텍스트가 여러 매체를 가로지르면서 어떻게 그 매체들과 상호적일 수 있는지를 드러내 주었다면, 좀 더 넓은 범주에서 예술적 작업과 당대의 매체적 환경의 관계를 문제 삼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복잡한 문제는 웹 혹은 인터넷과의 접경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웹 혹은 인터넷 그 자체의 특성도 아니고, 그것의 문화적 자장 아래에서 태동한 감수성 혹은 물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전략과 형식으로 구현된 실재하는 예술적 작업이 그 세계 안에서 어떻게 변주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을 어떻게 재정위시키는지에 대해 관심을 둔다. 영상작업과 관련해서는 브이드롬(www.vdrome.org)같은 온라인 상영플랫폼, 우부웹(www.ubu.com)같은 아카이브가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일텐데, 이는 웹을 또 다른 하나의 물리적 장소(전시장, 극장 또는 도서관)로 상정하게끔 하는 기술적 장치로 보인다. 그렇지만 단순히 좀 더 크고 깊은 그릇만은 아닌 것 같다. 


전소정 작가 개인홈페이지(junsojung.com)의 작품목록 (2017년 3월 2일 현재)
  

영상작가 전소정의 개인 홈페이지를 보면 웹이라는 또 다른 물리적 장소가 작업이 지닌 서사를 무한히 증식시키고 맴돌게 만드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연동되는 서사가 어떤 서사이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자신의 페이지를 운영할 때 시간 순으로 작업을 정리하여 올리는 것과 달리, 전소정은 제작 년도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구체적인 기준 없이 작업들을 여러 덩어리로 묶은 후 목록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임의적인 목록이 가능한 이유는 전소정의 작업이 지닌 특성에서 연유한다. 그의 지난 작업은 대개 직접 보거나 어디선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보물섬>(2014)이 이끄는 목록의 열 세 개의 영상은 특정한 직업의 전문가가 등장해 그 자신의 일상적 업무를 재현하는 이미지를 공유한다. 해녀, 피아노 조율사, 옹기장, 박제사, 수석가, 줄광대, 기계 자수사, 간판쟁이, 인형장인, 활자장인, 변검. 오늘날 통계적인 직업군으로 분류되기도 어려울 만큼 유별난 이들을 전소정은 매우 납작하게 재현한다.  아궁이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불의 시>(2015)에서 점토를 다듬어 옹기의 모양을 만들고 다시 아궁이에 넣어 구워 내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영상은 등장인물이 작업하는 과정을 선형적 시간 위에서 잇는다. 그리고 인물이 사건을 이끌어가기보다는 제작이 완성으로 나아가는 단계 위주로 편집되면서 주인공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서 기계의 작동을 보조하는 익명의 노동자처럼 보일 뿐이다. <사신>(2015)은 박제사가 하나의 박제된 새를 만드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마지막 기쁨>(2012)은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이동하는 줄광대를 보여준다. 화면의 주요한 미장센은 옹기의 모양을 잡는 손, 새의 눈알을 이리저리 만지는 손, 그리고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발을 클로즈업 한 이미지이다. 이는 스펙터클의 전형이다.[3] 삶을 대체한 생경한 몸짓은 예술의 클리셰가 되어 관습적인 드라마를 생성한다. 영상에는 이미지로 보여주는 가상의 드라마 이외에도 내레이션 또한 중요하게 삽입되어 있다. 발성과 연기에 익숙한 성우의 내레이션은 영상의 주된 소재 주위에서 맴돌기는 하지만 그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외려 그 목소리는 일종의 독립된 서사를 만든다. 전소정의 작업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서사와 서사가 중첩되고, 이어지고, 맞물리는 듯 거리를 유지하면서 ‘무한한 축적’의 연속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예술하는 습관>(2012)은 일곱 개의 짧은 영상이 하나의 긴 프레임 안에서 이어져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이 영상은 전소정이 서사를 사용하는 주요한 방식 자체를 잘 드러내준다. 프레임은 여섯 개의 영상만을 담지 못하는 비율이기 때문에, 하나의 영상이 화면 밖으로 밀려나면 바로 이전에 밀려났던 영상이 새로이 프레임 안으로 등장하는 방식으로 반복된다. 개별적인 무빙이미지가 제가끔의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그 움직임은 하나의 순환하는 모델 안에서 이루어진다. 즉 서사의 자율성을 제안하면서도 끊임없는 순환 안의 한 자리에 속하기를 강박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홈페이지의 목록으로 돌아가 보자. 목록에서 접속 가능한 마지막 링크는 <The Finale of a Story>(2008)이다. 이 작업은 작가가 핀란드를 여행하던 도중 숲속에 사는 한 남자무용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무대를 만든 작업이었다. 그리고 목록의 가장 첫 번째 <Three ways to Elis>(2010)는 바로 이 이야기에 대한 몇 년 뒤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무용수가 실제 살았던 집을 찾았고, 그를 기억하는 각기 다른 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또 다른 여러 개의 이야기로 증식한다. 실제를  증발시키고 스펙터클의 납작한 이미지로 생성된 드라마는 같은 자리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거나 두서없이 쌓일 뿐이다.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 전시 세부 사진


3.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오브제나 사물이라고 말하려면 짐짓 주저하게 된다. 그보다는 전시의 제목이 직언하듯 뭔가 가짜 같고 미심쩍은 파편들 혹은 조잡한 대체물인 것 같다. 전시장의 전체적인 감각은 지난해 작가가 참여했던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전시 <실키 네이비 스킨>과 거의 유사하지만, 이번에 좀 더 두드러졌던 것은 거울이나 유리와 같은 물성의 사용이다. 유리가 투명한 벽이 되어 이곳과 저곳을 나눈다면, 거울은 세계를 분열시킨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파편들에는 알 수 없는 글자 혹은 그림이 적혀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울에 반사된 것으로만, 혹은 투과된 빛에 의해 생기는 그림자를 통해서만 더 명료하게 볼 수 있다. 박보마가 사용하는 전시장과 전시장의 물질은 단지 표면의 반사된 빛만이 얇게 저며진 실제의 불완전한 재현처럼 보일 뿐이지만 그것을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실제로서 내놓는다. 혹자는 그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을 “fldjf-물질”이라고 표현한 바 있고 이러한 특징은 작가가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종의 픽션적 상황 속에서 유의미하게 표상된다.[4] 작가가 (자기 자신과 따로 또 같은 가상의 정체성으로) ‘fldjf studio’라는 페이지(http://fldjfs.wixsite.com/qhak)를 운영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이 페이지는 지난 작업의 기록이자 그 자체로 진행 중인 작업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고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 사이에 정주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떨리는 어딘가에 있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종결된다. 혹은, 쉽게 뒤집힐 수 있는 세계의 중첩지대를 오갈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써. 


※ 주

[1] 사뮈엘 베케트, 유예진 옮김, 『프루스트』, 워크룸프레스, 2016, 17쪽. 

[2] 인터넷 기술을 기반으로 1990년대 초반 등장한 넷아트는 이제 역사적인 대상이 되었다. 리좀(rhizome.org)은 작년 10월부터 ‘넷아트 앤솔로지’라는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100여개의 넷아트 작품을 선정해 향후 2년간 매 주 1개씩 웹페이지(https://anthology.rhizome.org/)에 업데이트 할 계획이다. 

[3] 2005년 시작해 아직까지도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한 가지 일에 종사하며 그 업무에 숙달된 평범한 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프레임은 이들이 몸에 익은 행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장면을 마치 대단히 놀라운 묘기인 듯 재현한다. 즉, 주인공들의 재빠른 손은 프레임이라는 무대를 통해 일종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의 삶은 손놀림으로 치환되어 제시되고, 시청자는 바로 그 이미지를 통해 주인공의 삶과 접속된다. 십 수년, 혹은 수 십년간의 지속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는 기구한 삶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내레이션인데, 마찬가지로 실제의 삶을 일종의 드라마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텔레비전의 평평한 스크린, 그리고 10분 내외의 인스턴트 포맷에 알맞은 형태가 된다. 삶의 현존이 이러한 재현으로 무한히 축적되며 유지되는 세계, 이제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스펙터클의 세계다.

[4] 박보마의 작업이 구축하는 일종의 ‘fldjf-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글을 참조하라. 김뺘뺘, 「fldjf-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하기」
(http://yellowpenclub.com/kbb/fldjf/#fn30013461cba499ffc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