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의 패러독스 The Godard Paradox (1986)

CRITIQUE

고다르의 패러독스 The Godard Paradox (1986)


세르주 다네




1985년 겨울. <카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한 자신의 글들을 한데 모은 두툼한 평론집을 발간하면서, 고다르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마스터클래스 형식을 띤 홍보차원의 '원 맨 쇼'를 진행하기로 동의했는데, 그 회원들이 이미 고다르의 팬들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로서는 어렵지 않게 답변할 수 있는 과도하게 정중한 질문들이 쏟아지던 가운데, 두 명의 청년이 다소 엉뚱한 질문 두 개를 던졌다. 왜 당신은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만들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왜 당신은 그 위대한 영화사랑을 더 이상 본인의 영화 속에 담아내지 않는 것인가.  당연히 고다르는 첫 번째 질문에는 답변할 수 있었지만 - 그는 이미 비디오물 <열정의 시나리오 Scenario du film Passion>(1982)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 바 있었다 -  두 번째 질문에는 다소 당황한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영화에 대한 사랑, 시네필리아, 옛날 영화로부터의 정겨운 인용 등과 관련해서, 고다르는 (그리고 모든 이들은) 그가 "그 자리에 있었고, 그러한 일을 수행했음"을, 즉 영화사랑을 실천했음을 의심치 않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를 비난하는 이들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영화를 향한 열정의 상징이 되어 버렸을 정도다.  '고다르'라는 이름은 (웰즈, 펠리니, 큐브릭 혹은 보다 최근에는 벤더스처럼) 한 명의 영화작가를 지칭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시네마라 부르는 이러한 이미지의 세계를 향한 집요한 열정과 동의어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은 오직 영화만을 욕망할 뿐이지만, 열정은 그 이상을 원한다. 영화를 향한 열정은 영화를 원하고, 또한 영화가 무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며, 심지어 영화가 변형의 힘에 의해 와해될 위험을 감수하는 지평을 갈구하며, 미지의 것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초창기에, 필름메이커들은 그들이 발명하고 있는 예술이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 믿었으며,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 믿었고, 여타의 예술들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으며, 인류의 문명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 강스와 에이젠슈타인에게 있어서, 결정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스트로하임 혹은 젊은 부뉴엘에게 있어서, 적어도 얼핏 보기엔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진화는 아직 할리우드 스튜디오 유성영화의 진화로 나아가기 전이었고, 전쟁과 더불어 씨름하기 전이었고, 질적 규준들 -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러한 규준들은 영화스튜디오의 생산물들을 산업적 텔레비전 영화의 수공업적 원형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이 마련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기 무섭게, 더 이상 그 누구도 (심지어 이론적인 수준에서조차) 영화의 미래에 열정을 쏟지 않았다. 또 다른 영화,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해 열린 영화라는 이상이 비로소 다시 가능해진 것은 전쟁 이후, 불경기가 닥칠 것임을 예고하는 초기 징후들이 나타난 이후, 누벨 바그라는 가미가제식 미봉책에 의해서였다. 

그렇다. 가능하다. 하지만 더 이상 초창기와 같은 자신만만한 낙관주의("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영화는 세기의 예술이 될 것이다.")는 없다. 대신에 노스탤지어의 색조를 띤 차분함("우리는 많은 영화를 보았다. 진실로 영화는 스스로가 세기의 예술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 세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이 뒤따른다. 잠깐 동안 완벽한 균형을 (예컨대, 혹스와 더불어) 누렸지만, 그것을 재생산하려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점을, 뉴미디어가 떠오르고 있으며 이미지의 물질적 본성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의 누벨 바그 친구들 뿐 아니라 고다르 자신에게 있어서 모호한 점은 그의 영화가 이러한 방향의 변화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데서 기인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는 단지 한 명의 위대한 영화감독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영화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필름메이커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메트르 에카르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가 그를 영화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는 기대에까지 이른다. 그는 우리의 계산을 뒤엎으며, 지나치게 쉽사리 그를 경배하는 이들을 실망시킨다. 언제나 고다르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중인데, 이러한 움직임은 당신으로 하여금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것을 가능케 하고 당신의 부단한 에너지를 보여주기엔 여전히 충분할 만큼 커다란 영화적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철학자, 과학자, 설교자, 교육자, 저널리스트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로서 그러하다. 그는 영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일관된) 목격자인 동시에 (도적적) 양심이었던 (지금까지는) 최후의 인물이다.

특정 이슈들에 대해 충분히 강렬하게 느끼기만 한다면, 동시대의 모든 필름메이커들에겐 영화의 '죽음' 및 그것의 미래의 변형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험' 영화 감독들이나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업은 물론이고, 뒤라스와 지버베르크의 급진주의, 코폴라의 테크놀로지적 유토피아 등을 살펴보면, 이러한 필름메이커들이 영화란 과거에 속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때의 로셀리니처럼 고다르가 자신의 출발점(영화)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설교자 내지는 예언가로 자처한다면, 그의 이미지는 보다 분명해질 수도 있으리라.

예언가와 발명가는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존의 형식들을 출발점으로 활용하면서, 고다르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이해에 관한 오늘날의 형식을 '발명했다'(다시 말하자면, 기워 맞췄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시대보다 조금 앞서 있었지만, 한편으론 당대의 평균적인 환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영화가 보다 정치적이 되었을 때, 보다 교묘했던 그조차도 당대의 다른 '마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순성에 빠져들고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 베르토프는 예언자였고, 고다르는,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시대의 동시대인이었다. 그의 초기영화들이 보여준 천재적인 솜씨의 미학적 충격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관객보다 약간 앞서나가는 것을 (생각보다는 다소 오래) 허락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많은 형식적 발명가들처럼 전위로 물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뒤에 남겨졌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있다. 그는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의 시선을 통해 기존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이 변화되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심상찮게 소외되었다는 느낌에 지쳐 있고, 누군가 더 이상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을 때 생겨나는 수수께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이상의 언급은 고다르의 패러독스를 요약해 보여준다. (옛 것과 다가올 것을 쉽게 결합시킬 줄 알았던 예언가들과는 달리) 고다르는 얼마 전의 과거와 가까운 미래 사이에 붙들려 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과 아직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현재에 있도록 저주받은 자이다. 그의 강렬한 변증법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현재에 대한 이 뚜렷하고 자발적인 취향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상호대립적인 것들의 광대한 조작을 통해, 혹은 이미지 - 즉 리얼리티의 궁극 - 의 신비주의를 통해 이러한 현재를 발견할 수 있다. 너무나도 바쟁적인 고다르는 '리얼리티'의 상실을 차마 감수할 수 없기에,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지시대상들의 일반화된 상호작용으로 이를 대신하거나, 이미지는 더 이상 의사소통의 인간적 수단으로 - 심지어 부정적으로라도 - 사용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편을 택한다.

흔히 고다르는 "무서운 아이",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우상파괴자" 그리고 "혁명가" 등으로 묘사되어 왔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애초부터 (트뤼포와는 달리) 게임의 규칙을 존중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사실상 고다르는 규칙의 부재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다. 고다르에게 혁명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그는 급진적 개량주의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데 왜냐하면 개량주의는 현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 상업적 이익, 프로듀서 혹은 영화제작의 어떤 방식들에조차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만의 유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다르게', 설령 예전과 같이 계속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가능성에 그들 자신을 활짝 열어두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는 같은 것을 다르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그의 유토피아는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