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내 곁에 있어줘
: 필립 가렐과 고독의 인상학
유운성
<밤바람 Le vent de la nuit>(1999)의 중반부, 엘렌(카트린 드뇌브)은 젊은 연인 폴(자비에 보부아)을 집으로 데려가 자신의 남편(자크 라잘)에게 소개한다. 그녀가 감행한 일상의 작은 모험은 이내 긴장을 잃고 나른한 오후의 대화 속에서 덧없이 녹아내린다. 그녀가 거실 창밖의 거리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동안 남편은 폴에게 작가 앙투안 블롱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가렐은 세 인물 각각의 얼굴을 따로 포착해 보여줄 뿐, 둘 혹은 셋을 한 숏에 담아 보여주지 않는다. 블롱댕에 대해 이야기하던 남편이 “자넬 폴이라고 불러도 되겠나?”라고 말하며 친교의 뜻을 내비칠 때, 불현듯 카메라는 그의 머리 위로 서서히 이동해 닫힌 창문과 커튼을 보여준다. 이 텅 빈 무인(無人)의 프레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화면 왼쪽에서 불쑥 나타난 엘렌이 거실을 시계방향으로 돌아 CD 플레이어에 디스크를 넣고 재생하기까지의 모습은 지금껏 화면에 흐르고 있던 나른함의 공기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만큼 단호하기 짝이 없다. 그녀가 실어 나른 청량한 운동감이 그녀의 동작을 고스란히 좇는 파노라마 촬영에 의해 배가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진 1]
기이한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숏이다. 가렐은 하얀 벽에 기대어 자신이 방금 재생한 음악을 듣고 있는 엘렌의 모습(사진 1)을 보여준다. (점프 컷을 통해) 앞선 숏의 청량한 운동감을 돌연 중단시키면서 등장하고 있는 이 정적인 숏은 과도하게 여겨질 만큼 독립적이어서, 이 순간 우리는 그녀가 있는 곳이 남편과 폴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실인지 혹은 집 안의 다른 내밀한 장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 숏이 지속되는 동안 사운드트랙에서는 음악만이 들려올 뿐 남편과 폴의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고립감은 더욱 강화된다. 이때 카메라가 슬며시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살짝 열린 창문1을 보여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곳이 거실이라는 점을 알게 되지만, 이는 안도감을 주는 것이기보다는 가렐의 영화에서 창문이나 거울이 죽음으로부터의 손짓이기도 하다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불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벽의 경계 La frontière de l’aube>(2008) 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불길함은 현실화된다.) 이윽고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벽에 기대어 있는 엘렌의 모습을 다시 보여준다. 이때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만 소리를 줄여 주겠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잖아.”
잠시 후 엘렌은 남편과 폴 앞에서 깨진 유리잔으로 손목을 그어 서툰 자살 소동을 벌인다. 자신보다 멋진 존재들이라고 생각한 운동선수들 앞에서 자살할 생각을 했다는 작가 블롱댕에 대한 남편의 이야기와 그녀의 자살소동이 공명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고독의 순간에 조응하는 얼굴,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가렐다운 얼굴이 화면에 지속되는 것을 방해한 목소리에 대해 영화 스스로가 표하는 항의의 몸짓 또한 느껴진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연인이었던 니코와의 관계가 반영된 자전적인 작품인 <비밀의 아이 L’enfant secret>(1982)를 계기로 가렐이 초기의 실험적인 작업에서 이른바 ’내러티브 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최근작인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L’ombre des femmes>(2015)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속되지 못하고 이내 무너져버리고 마는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연인들의 우화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영화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얼굴을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일이 왜 그토록 힘든 것일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점에서 가렐의 연인들은 나루세 미키오의 연인들과 유사한데, 이들의 영화에서 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란히 앞을 보거나 비스듬히 시선을 교차시키며 다른 곳을 보는 존재들이다.) 그의 영화에서 기본이 되는 바라봄의 논리는 캔버스 맞은편에, 무대 위에, 혹은 카메라 앞에 선 연인을 바라보는 자의 그것처럼 매개화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고다르 영화의 그것과 닮았다.) 하나의 화면에서 서로를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때 가렐의 연인들이 취하는 몸짓은 (때로는 격렬하기 짝이 없는) 포옹인데 이는 상대의 눈 속에 어느새 깃든 파국의 예감을 떨쳐내기 위한 절망적인 몸짓(시선의 회피)처럼 비친다. <비밀의 아이> 오프닝에서 우리는 다정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모습을 보게 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숏이 매개화된 것임을 드러내는 표지들(클래퍼보드, 화면 중앙의 ‘X’ 표시, 사운드트랙의 화이트노이즈 등)이 주어진 다음이다. (사진 2) 화장실을 찾은 소녀는 남자친구가 화장실 안에 있음을 알고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잠시 후 각자 용변을 마친 연인은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키스한다. 용변과 키스라고 하는 이질적인 행위를 은밀함/친밀함(intimacy)의 순간으로서 한데 묶는 장면은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J’entends plus la guitare>(1991)에도 등장한다.
[사진 2]
에이드리언 마틴은 <비밀의 아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산파처럼 영화의 탄생에 참여하고 있는”2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영화라고 쓰기도 했는데, 가렐에게 있어서 영화의 탄생이란 (앞서 예시한 <비밀의 아이>의 오프닝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탄생’(la naissance de l’amour)과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가렐의 영화는 그것과 동시에 태어난 사랑을 서서히 연소시킴으로써 얻은 희박한 열기를 자신의 육신을 위한 자양으로 삼는다. 그에게 있어서 ‘내러티브 영화’란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연인의 모습을 하나의 화면에 담는 일은 그 관계의 은밀함/친밀함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패러독스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시간이 사랑을 파괴하듯, 영화 또한 사랑을 파괴한다.”라고 가렐은 말한 적이 있다.3 <비밀의 아이> 오프닝에서 용변을 본 후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키스를 나누었던 연인은 (‘비밀의 아이’라는 타이틀이 뜬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소녀는 침대에 엎드려 팔로 턱을 괴고 있고 소년은 그녀 곁에 앉아 있다. 소녀가 문득 고개를 돌려 소년 쪽을 바라보면 카메라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데 이때 소년은 그녀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윽고 소년이 고개를 돌려 소녀 쪽을 바라보면 카메라는 다시 소녀 쪽으로 향하는데 이때 그녀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왕복운동은 두 번 더 반복되며 결국 소년은 시선의 마주침의 실패를 상쇄하기라도 하려는 듯 소녀 쪽으로 다가와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는다. (사진 3) 가렐의 영화에서 포옹에 담긴 불길한 함의는 앞서 지적한 대로다.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에서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는 마리안느(요한나 테어 스테게)와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제라르(브누아 레장)가 키스하는 모습을 담은 숏에 뒤이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제라르 앞에서 헤로인을 꺼내 드는 마리안느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여기서 가렐 특유의 과감하게 생략적인 편집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것을 대하는 영화라는 가혹한 장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 3]
이제 우리는 가렐이 그의 연인이었던 니코와 함께 공연한 <내부의 상처 La cicatrice intérieure>(1972)에서 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신화적인 제의(ritual)의 형식을 영화의 토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실제 가족(아버지 모리스 가렐, 아내인 브리지트 시,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루이스 가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모두 등장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인 <구원의 키스 Les baisers de secours>(1989)의 긴 도입부에서 잔느(브리지트 시)가 마티외(필립 가렐)에게 던지는 말들의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감독인 마티외는 아내인 잔느와 자신이 함께 등장하는 영화를 찍으려다 생각을 바꿔 자신은 출연하지 않고 잔느가 맡기로 한 역할은 다른 배우에게 주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이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진 잔느가 마티외를 찾아와 던지는 말에는 사랑과 영화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대한 가렐적 모티브가 고스란히 표명되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 거울에 비친 우리를 봐. 보지 않는구나. 당신은 나만을 보거나 당신만 보려 해. […] 사랑이란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거야.” 마티외는 잔느의 말에 답하지 못한다. <비밀의 아이>의 소년처럼, 그저 그녀를 뒤에서 포옹하며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려 할 뿐이다.
연인 앞에 서서 애타게 사랑을 갈구하는, 다시 말해서 동시에 서로를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이를 지켜보는 일은 버겁고 고통스럽다. 이미 파국은 저만치 앞에 와 있고 그들 또한 이 사실을 감지하고 있다. 둘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감정의 인력이 소진되기 직전의 찰나, 이 위태로운 순간을 사랑이 끝나버린 자리에서 추억하는 일에 가렐식 ‘내러티브 영화’의 잔혹한 힘이 놓여 있다 할 것이다. (가렐의 영화들은 플래시백이 없이 작동하는 추억의 영화 혹은 영화적 추억처럼 느껴지곤 한다. 따라서 주인공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 광경을 보여준 뒤 그의 친구의 내레이션을 따라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뜨거운 여름 Un été brûlant>(2011)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사랑을 드러내고 또 지우면서 자신의 힘을 얻는 영화의 잔혹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은 <자유, 밤 Liberté, la nuit>(1984)이다. 작품 종반부에서 우리는 제미나(크리스틴 부아종)가 “나는 보호와 다정함을 원해요. 당신이 날 어루만져 주기 바라고요.”라고 말하며 장(모리스 가렐) 앞에서 울먹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때 그들과 카메라 사이로 빨랫줄에 걸린 하얀 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연인들의 모습은 나부끼는 천들 사이로 힐끗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에 온전히 가려지기도 한다. (사진 4) 위태로운 사랑의 광경을 자양으로 움트는 영화, 그것을 떠받치는 백색 바탕(스크린)을 상기시키며 천연덕스럽게 나부끼는 천을 보고 있노라면 일순간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사진 4]
그래서일까?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듣는 <밤바람>의 드뇌브의 얼굴처럼 어떠한 서사적 정황과도, 심리적인 암시와도, 몽타주의 논리와도 무관한 듯한 절대적이고 단독적인 얼굴이 가렐의 영화에 출현할 때 우리가 은밀히 안도하게 되는 것은? <자유, 밤>의 제미나가 희뿌연 유리창 너머 어딘가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길게 포착한 숏(사진 5)도 떠올려 본다. 이러한 얼굴을 담은 숏은 돌연 영화를 중단시키면서 그것을 초상사진이라는 기원의 매체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홀로라면, 파국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의 탄생도, 영화의 탄생도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가렐의 ‘내러티브 영화’에서 이러한 숏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파국이 드리워진 사랑의 현장에 이내 자리를 내어준다.
[사진 5]
하지만 우리는 가렐의 ‘내러티브 영화’의 이면에 고독의 인상학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카메라를 바라보거나, 화면 바깥의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거나, 작업에 몰두하거나, 거리를 배회하거나,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울부짖거나, 침대에서 뒤척이거나 잠들어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담긴 정적인 숏들이 별다른 연관 없이 이어지는 가렐의 1970년대 ‘초상-영화들’(portrait-films), 그 가운데 거의 전적으로 진 세버그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는 <처절한 고독 Les hautes solitudes>(1974)에서 이미 정점에 달한 고독의 인상학을 말이다.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영화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다. 이 세계가 제공하는 기원의 풍경은 <계시자 Le révélateur>(1968)나 <내부의 상처> 같은 제의적 영화들을 감싸고 있는 신화적인 세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처절한 고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한때 사진적 이미지를 그토록 강렬한 것으로 만들었던 기원의 풍경, 곧 인간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 얼굴은 가렐의 ‘내러티브 영화’ 이면에서 유령처럼 떠돌다가 때때로 그것의 균열을 헤집고 튀어나와 배우들의 얼굴에 정착되곤 한다. 그 순간 가렐의 영화는 잠시 멈추어 서서 가만히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옛 기억을 더듬는다. <밤바람>의 엘렌이 돌연 남편과 연인 앞에서 손목을 그을 때, 우리는 세버그가 실제로 자신의 남편과 가렐이 보는 앞에서 손목을 그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여기서의 드뇌브는 이미 세버그의 현신임을 깨닫는다. 그녀가 음악을 듣는 사이에 저 열린 창문을 통해 유령이 깃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