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시네광주 1980

REVIEW
2020.6.24 OKULO online exclusive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시네광주 1980

김혜림


2020년 5월 21일부터 5월 30일까지 네이버 TV를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 제40주년 기념영화제 시네광주 1980이 열렸다. (영화제 홈페이지는 http://cineg1980.kr)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본래 계획했던 서울과 광주에서의 오프라인 상영은 실행되지 못했으나 온라인 상영을 통해 보다 폭넓은 관객에게 관람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실시간 온라인 스트리밍 상영을 통해 같은 시간에 하나의 URL로 모인 관객들은 경계를 넘어선 임시적 광장을 만들었다. 코로나19로 빚어진 세계적 재난의 상태에서, 온라인으로 상영되는 일군의 영화들을 통해 과거의 학살에 다가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감염병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 고립은 당시 외부와의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던 광주의 상황을 감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어떠한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기억하는가? 영화의 가능성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재생하는 데 있을 수도 있다. 빌렘 플루서는 『몸짓들』에서 "영화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소개하고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폐막한 전주국제영화제와 칸, 베니스, 베를린 등 20개의 국제영화제가 참여한 위아원영화제(We Are One: A Global Film Festival)까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발맞추어 여러 국제영화제들이 온라인 영화제 포맷을 실험했다. 온라인 영화제는 그간 정상상태로 규정되었던 오프라인 영화제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페스티벌스코프와 MUBI 등 이미 온라인을 통해서 영화를 큐레이팅하고 스트리밍하는 서비스가 자리 잡은 때에 온라인 영화제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긴 영화제를 과연 코로나19로 인해 빚어진 예외상태라고만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간 오프라인에서 열렸던 영화제들의 문제점(막대한 자본 및 관료적 제도를 통해 위태롭게 지탱해 온 영화제의 물적 조건들)을 되돌아볼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지난 4월, “칸영화제의 영혼과 역사, 효율성 측면에서 온라인으로 영화제를 개최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때 칸이 지니고 있다는 영혼과 역사, 효율성이란 과연 유효한 근거인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온라인 영화제를 과연 영화제라는 기존의 제도적 형식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가? 단순히 오프라인에서 열리던 행사가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았는가? 

위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물음들을 더하면서, 시네광주 1980이라는 영화제와 여기서 상영(스트리밍)된 영화들로 관심을 돌려 보기로 하자.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경계 세우기의 시도 속에서 광주는 어떻게 소환되는가? 1980년 5월이라는 확실한 시간적 경계와 봉쇄된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공간적 경계는 일견 견고해 보이지만 실상 홀로그램과 같은 것은 아닌가? ‘경계’는 광주를 둘러싸고 있는 핵심적 모티브들 가운데 하나다. 사건의 존재 여부 자체를 규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5.18을 다룬 영화들은 이러한 규명을 시도하는 동시에 경계 세우기/허물기를 반복적으로 행한다. 이 모든 경계의 문제는 개인의 기억이 공적 역사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5.18이 기념의 대상으로서 성립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사적 기억이 공적 역사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역설은 사적 기억이 역사화될 때 탈각되는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경험―두려움, 공포, 낯섬, 심지어는 역사를 구성하는 픽션에 이르기까지―이 탈각된 채 역사화된 기억을 계속해서 여전히 기억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인가. 

“광주 시민은 역사라는 드라마에서 자신도 모르게 배역으로, 주체로 출연했다.” 이처럼 ‘픽션적’ 경험이 광주라는 사건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 이에 다가가는 일은 필연적으로 경계를 세우고 허무는 시도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산발적으로 뒤섞여있는 광주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그들의 사적 기억을 공적 역사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역사화의 움직임 속에서 영화는 마치 고고학자처럼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발굴해낸다. 광주라는 사건 자체의 존재/부재라는 경계, 이 사건을 사건으로 성립시키는 시공간적 경계, 피해자/가해자의 경계 등은 광주를 결정짓는 문제들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국영화를 되돌아보면서 동시대 한국 사회에서 5·18의 현재적 의미를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목표 아래에서, 시네광주 1980은 어떠한 경계를 소환하고 또 극복하고자 하고 있는가?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인 이조훈의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은 복사된 움직임을 ‘재생’하는 비디오의 속성이 기억으로서 전승되어 온 5.18의 그것과 닮아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 영화처럼 보인다. 물질적으로 공간을 횡단하며 이곳저곳으로 복사되어 떠돌아다녔던 비디오는 존재 자체가 일종의 운동으로서 기능한다. 성당에 모여 작은 브라운관에서 재생되는 광주 비디오를 망연히 바라보는 사람들을 포착한 장면은 이 영화에서 단연 중요한 부분이다. 과거의 흔적을 더듬으며 현재에 기억의 움직임을 재생하는 이 영화 속의 인물들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은 각자의 이질성을 지닌 채 겹쳐진다. 이조훈이 광주 비디오를 통해 사건을 경험한 이들과 관객을 오버랩한다면, 임흥순은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아르헨티나 5월 광장과 5.18을 교차시키며 광주 바깥의 광주, 혹은 재생되고 반복되는 학살과 실종의 역사를 다룬다. 지구 반대편에서 각각 벌어진 경찰과 군대에 의한 학살의 역사는 감독이 택한 형식인 2채널처럼 완전히 겹쳐질 수 없는 것이다. <좋은 빛, 좋은 공기>가 아르헨티나와 광주의 이질성을 하나의 차원으로 연결하는 것은 자막을 통해서다. 증언과 사적 대화의 경계에 놓인 인터뷰가 활자화된 자막을 통해 아르헨티나와 광주의 풍경을 연결한다. 이는 세계를 확장하고 경계를 허무는 시도다. “광장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좋은 빛, 좋은 공기>가 택한 2채널의 이질성, 그리고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활자는 5월 광장을 광주로 확장하고, 광주의 경험을 광장으로 퍼트리려는 시도다. 

영화를 통해 5.18에 접근하고자 할 때 진정 까다로운 지점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있다. 이는 40년 전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이기에 당사자성이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하는 기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적 학살과 저항의 역사의 연장선에 놓일 수 있는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다. 시네광주 1980의 ‘광주 프리미어’ 부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문제와 관련해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때의 헤맴은 부정적인 헤맴이 아니다. 경계에 부딪히고, 그에 균열을 내려는 모든 시도들은 때로는 실패하지만 바로 그 실패 속에서 사라진 시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조훈의 영화와 임흥순의 영화는 모든 가상적 경계 사이에서의 헤맴을 자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아르헨티나와 광주의 광장들의 풍경,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에서 감독이 강박적으로 좇는 비디오의 물리적 자취가 그렇다. 남미숙의 <스무 살> 역시 강원대학교와 춘천의 보안대 지하실 등 과거의 공간에 다시 찾아가면서 만들어지는 기억에 집중하는 영화다. 뒤섞이는 네 사람의 음성은 듣는 이를 찾지 못하고 공중에서 헤맨다.


<좋은 빛, 좋은 공기>


시공간적 경계 설정의 문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균열, 국가적 경계에 대한 질문, 정치적 경계 허물기로 이어진다. ‘광주 프리미어’ 부문의 극영화들은 특히 이 문제에 천착한다.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직접 인용하고 있는 박기복의 <낙화잔향>은 외부인을 광주에 불러오면서 일단 그들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테두리에 묶어놓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 경계가 강고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낙화잔향>에서 광주라는 지역은 어떠한 속성도 갖지 않았던 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름 아래 구분하는 허구적 경계로 기능한다.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는 허구적 경계를 넘어서 이전의 상태, 즉 ‘속성 없음’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것이다. 김재한의 <쏴! 쏴! 쏴! 쏴! 탕>역시 <낙화잔향>과 마찬가지로 광주의 역사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낙화잔향>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광주를 탈출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쏴! 쏴! 쏴! 쏴! 탕>의 주인공 세 명은 서로 뒤섞이기를 선택한다. 방아쇠가 향하는 방향은 계속해서 뒤바뀌면서 다른 이들을 겨눈다. 이 두 영화는 극영화의 형식을 빌어 가상적인 공동체를 만든다. 그런데 그 공동체는 단일한 이름으로 명명될 수 없는 것이다. 군인도 피해자의 경계에 놓일 수 있다는 논지로 국가적 폭력을 개인화하려는 시도가 과연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모든 인물들을 속성 없는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접근하는 작업의 주요 과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 영화의 문제는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개인화하면서 일종의 봉합이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낙화잔향>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본다. 억울한 넋을 기리기 위한 굿, 그리고 창(唱)과 서예를 전시하는 것, 과연 이를 결말을 위한 합당한 선택으로 볼 수 있을까? 자크 데리다는 애도란 끝이 없고(interminable), 위로할 길이 없고(inconsolable), 화해할 수 없는(irreconcilable),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무엇이라고 했다. <쏴! 쏴! 쏴! 쏴! 탕>의 제목에서도 강조되는 마지막 총성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영화가 의도적으로 이를 가리고 있는 것은 결국 허구적 경계를 드러내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백정민의 <휴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18 행방불명자들에 관한 뉴스를 보고 나서 광주를 경유해 제주도로 향하는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경계 짓기와 허물기의 과정은 5.18에 관한 극영화들이 반복적으로 좇는 주제다. 광주는 과연 픽션화될 수 있는가.


<우리가 살던 5월은>


박영이의 <우리가 살던 5월은>은 경계의 문제에서 벗어나 ‘반복’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광주의 대학생과 재일동포 대학생이 만나 5.18의 흔적을 밟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의도적이다 싶을 만큼 영화의 시작부터 경계의 문제를 배제하고 있다. 경계의 문제에 천착하는 대신 광주 바깥에서의 5.18을 보여준다. 재일교포에게 덧씌워지는 혐한 정서와 5.18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광주의 시민군들에게 부여되어왔던 빨갱이 프레임은 닮아있다. 영화는 코로나19로 인한 전지구적 재난에서도 배제되고 있는 재일교포를 다루며 현재에도 수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광주에 대한 폄훼가 본질적으로 경계의 문제와 맞닿아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는 이 작품이 경계(짓기)로부터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늘색 심포니>(2016)나 <사이사-무지개의 기적>(2019) 등의 전작에서도 박영이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던 북한과의 관계, 경계(선)의 무의미함은 <우리가 살던 5월은>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정경희의 <징허게 이삐네>, 김고은의 <방 안의 코끼리>는 5.18 이후의 세대가 광주를 기억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징허게 이삐네>는 5.18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광주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방 안의 코끼리>는 노인과 아이의 세대적 차이를 타임머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광주는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진동하는 덩어리다. 그렇다면 이 이질적인 영화들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인가?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교차되는 지구 반대편의 광장들,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에서 일시적으로 형성된 비디오적 장소가 그곳일까? 문득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