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도착한 액자들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REVIEW
2020.5.4 OKULO online exclusive


먼저 도착한 액자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정경담




〈페인 앤 글로리〉의 주인공인 살바도르의 인생의 얼개는 우리에게 알려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를 구성하는 각각의 설정들은 수십 년에 걸친 그의 작업에 넓게 흩뿌려져 있었고, 이제는 온전한 자신의 원본에 가깝게 디스크 조각모음 되어 첫 쇼트의 수영장 수면 아래에 잠수한 채 모습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가 유년기를 보낸 신학교(〈나쁜 교육〉), 졸업 후 마드리드로 상경해 영화를 찍기 시작하고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다는 것, 어머니의 존재감(〈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 〈하이 힐〉), 병든 몸(〈그녀에게〉), 그리고 그가 게이라는 사실까지. 완성된 형상은 그와 많은 작품을 함께해온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모습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살바도르 마요라는 자는 반데라스의 껍데기를 쓴 알모도바르, 알모도바르로 분한 반데라스라기보다는 서로의 피부를 덧대면서 만들어낸 반데라스와 알모도바르의 새로운 혼융물처럼 보인다. 완전히 알모도바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반데라스도 아닌, 그렇다고 ‘제3의’ 라거나 ‘경계의’ 같은 수식을 붙이기도 애매한 누군가인 것이다. 살바도르는 (우리나라의 영상자료원과 유사해 보이는) 영화박물관으로부터 삼십년 전 만들었던 작품 〈사보르 Sabor〉의 재상영과 더불어 주연 배우인 알베르토 크레스포와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제안받은 상태다. 그는 몇 년 전 어머니 하친타를 먼저 떠나보냈고 2년 전에 등을 수술했으며 그 후유증 때문에 헤로인을 시작했다. 또 석회화된 식도 뼈 때문에 목이 쉽게 막혀 먹거나 숨쉬는데 불편을 겪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스크린에는 어김없이 액자가 걸린다. 〈페인 앤 글로리〉의 액자들을 시간의 범주에 따라서 나눠 보면 최소한 세 겹의 차원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노년이 된 영화감독 살바도르 마요의 현재, 유년시절 동굴집에서 살던 기억, 어머니 하친타의 임종에 즈음한 비교적 가까운 과거가 그것이다. 그리고 액자는 살바도르의 작업실 책상에 놓인 아이맥에서 바탕화면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더블클릭했을 때 마치 하나의 활성창처럼 화면 위로 떠올라, 연극 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내레이션을 띄우는 방식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이 때의 액자는 몇 개월 정도의 비교적 짧은 시간을 축지하고, 유년기와 현재를 오가는 액자는 50년 이상을 순식간에 축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액자들은 순차적인 관계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액자들은 서로를 통과하고, 포함시켰다가 역으로 포함되고, 프레임만 도려내어져 버려지기도 한다. 영화 속 유년기가 사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시제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영화가 유년기의 기억을 ‘기억을 위한 장면’만으로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모든 타임라인의 가장 뒷부분에 해당하는 살바도르의 새로운 영화 촬영 현장임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살바도르의 꿈이나 환각이라고 느꼈던 차원은 공란으로 남는다. 살바도르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헤로인을 흡입해 왔지만 그것이 그에게 실제로 무엇을 불러일으켰는지 종국에는 알 수 없어진다. 오히려 액자 없이 현재의 타임라인 위에서 진행된 어떤 사건들만이 별개의 시공을 가지고 시점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테면 옛 연인 페데리코와 재회하는 장면이 그렇다. 30년 전의 과거를 재연의 형식으로 보여주지 않았을뿐더러(이 이야기는 오로지 〈중독〉이라는 제목으로 시연된 알베르토의 일인극 속에서 독백으로만 설명된다), 끝끝내 사랑했던 두 사람의 과거를 현재의 정념으로 데려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살바도르는 자신에게 글을 배우고 댓가로 동굴집의 벽칠을 도와줬던 석공 청년 에두아르도의 몸을 떠올린다. 국내 수입사의 무단 편집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장면이기도 한 이 기억은 유일하게 마약이나 마취제가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단서로써 촉발된 것이다. 전시 컬렉터가 바르셀로나의 벼룩시장에서 구한, 익명의 거리 예술가(실은 에두아르도)가 그렸다는 그림 속에는 붉은 피케셔츠에 반바지를 차려입은 어린 살바도르가 앉아있다. 그림은 살바도르의 지난 60년을 몰래 견인해왔다. 생동한 상태로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던 화석화된 기억을 소생한 것이다. 이 기억은 살바도르를 눈물짓게 하고, 다시 영화를 만들게 하고,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페인 앤 글로리〉가 먼저 도착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그의 과거를 지탱했던 인물들과 노쇠한 그는 이미 결별한 것처럼 보이고, 알베르토의 헤로인과 마취제가 그의 오래된 기억 속에, 혹은 하드디스크 속에 잠들어 있던 고통이자 영광의 순간들을 꿈과 환각의 형태로 다시 불러 들여오는 것 같지만, 그것은 종국에 영화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페인 앤 글로리〉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화려한 인포그래픽 시퀀스는 모두 특정한 징후 뒤에 오는 깨달음이나 지식, 소급하여 알게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 감독으로서의 성공 이후 전 세계로 프로모션을 다니면서 지리적 지식이 생겨났고, 척추의 건염이나 불면증, 궤양, 근육통 같은 질병들 때문에 생로병사의 비밀과 몸의 구조를 인식하게 됐으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떤 통찰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를 깊이 괴롭히는 것은 외과적 고통과 함께 오는 “공황과 불안 같은 영혼의 아픔”이다. 우울이 도착했을 때 무신론자인 살바도르는 돌연 신에게 기도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상쇄한다고 말하며, 〈사보르〉의 주연배우인 알베르토를 다시 만나면서부터는 헤로인이 신의 자리를 대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은 살바도르가 다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된다. 영화를 만드는 것. 살바도르의 과거가 다시 영화를 하도록 그를 이끌었지만, 〈페인 앤 글로리〉 속에서 바로 그 과거는 ‘다시 찍은 영화’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넘실거리는 삶은 응결되어 어떤 순간 속에 고정된 것처럼 보여야 한다”던 철학자의 말을 떠올렸다. 재연과 과거가 도플갱어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것의 합집합인 〈페인 앤 글로리〉와 ‘알모도바르의 삶’이 또다시 도플갱어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페인 앤 글로리〉는 우리를 다큐멘터리, 자전적 영화, 전기 영화 같은 분류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알모도바르의 인생을 충분히 되짚을 수 있도록, 그리고 최후에 남는 감상이 그의 인생에 대한 어떤 감흥으로서만 마무리되지 않도록 돕는다. 그것은 영화가 조직된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알모도바르는 과거-현재-촉매-회상-재연의 구조를 만들고, 그 내용물의 순서를 우리가 눈치챌 수 없도록 은밀하게 뒤섞은 뒤 철썩같이 믿게 하고, 마지막에야 모든 것을 밝힌다. 우리는 과거-현재-촉매-회상-재연이라는 영화 구조 전체가 ‘살바도르’로 묶이고, 그것이 반데라스와 알모도바르라는 실존 인물의 육체를 오가며 더 복잡하게 엉킨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된다.




노년의 감독들은 이상하게도 이런 영화를 자꾸만 만들어낸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가 그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랬고 또 마틴 스콜세지가 그랬듯이. 이들은 각자의 방법을 통해 영화예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낙관적 전망, 그리고 존재 의의를 증명하려 한다. 지난 세월에 대한 회고인지 정리인지 유언인지 아니면 정당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알모도바르가 “사랑조차 사람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영화로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있다는 주장을 자신의 온 삶으로서 방증해 보이고자 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먼저 도착한 영화-기억이 과거의 모습으로 우리를 설득했으니 아무래도 그의 기획은 성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