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동물원의 동물들을 위한 질문
: 이원우의 <옵티그래프>
이도훈 / 『오큘로』 편집동인
이원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옵티그래프>가 관객을 향해 처음으로 말을 걸어오는 장소는 뜻밖에도 동물원이다. 그녀의 단편 <꿈나라: 묘지 이야기 1>(2007)에서 동물원이 몽환적인 이미지로 쓰였다는 것을 기억할 정도가 아니라면, 장편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서 작품의 주요 출연자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동물원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러한 시도는 관객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감독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국내외 여러 동물원을 방문해 촬영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식의 질문을 던진다. “(미국 동물원에 있는) 아프리카의 기린은 아메리카의 기린이 될 수 있을까?”, “(중국 동물원에 있는) 백두산 호랑이는 중국의 호랑이일까?” 등. 이 질문들은 한 존재가 본래의 자리에서 전치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정체성의 혼란과 관련이 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동물원에서 시작된 사소한 질문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한 집단의, 한 국가의 모호한 정체성을 탐구하려고 한다.
시작부터 표류하는 것이 이 영화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다. 감독은 도입부에서 이 작품의 제작 동기가 감독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감독은 외할아버지의 백수 잔치에 참석했을 때 외할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자서전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약속된 자서전 집필을 시작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예기치 않은 죽음, 망자가 된 의뢰인, 그리고 유예된 약속. 이로 인해 이 영화의 운명은 목표 달성에 실패하거나 중심에서 탈구될 것으로 정해진다. 또한 감독은 외할아버지에 관한 전기 영화를 만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리서치를 시작하자마자 역사의 무거운 장막을 벗고 나온 새로운 사실들과 마주한다. 그의 외할아버지 장석윤은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 정보국(OSS) 특수요원이 되어 한동안 버마(미얀마)에 머물렀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중경을 드나들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연락책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그는 한국전쟁 직전 치안국장을 역임하면서 국민보도연맹사건과 관련된 공식 문건에 도장을 찍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역사는 그를 장석윤인 동시에 몬타나 장, 알렉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장석윤은 여느 가정의 평범한 할아버지와 같은 보편적인 인물이 아니라 현대사가 만들어낸 복합적인 인물로 형상화된다.
이처럼 객관과 주관의 상호침투적인 관계가 반복되면서 이 영화 전체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 불안한 구조는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의 과거사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감독이 겪었을 심리적 동요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에 비해 더 설득력 있는 진단은 이 영화의 형식적 혼란이 이 영화 속 텍스트의 불안정한 지위에 조응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양식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오히려 가능한 형식과 양식들이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자의적으로 동원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감독이 외할아버지의 생애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기 영화로, 그의 과거 행적을 좇기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타국의 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했다는 점에서는 여행 영화 또는 민속지 영화로, 그리고 그의 과거 흔적을 찾기 위해 대사관, 박물관, 전쟁기념관, 기록물 보관소에서 수집한 사진, 영상, 문서를 활용했다는 점에서는 파운드 푸티지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감독 자신의 주관적 사유를 드러내면서 가족사를 넘어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다큐멘터리 내지는 에세이영화로 볼 수도 있다. 이원우 감독은 그간 다큐멘터리 이론가들이 구축해 놓은 양식적 도식을 흔든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법칙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수준을 넘어, 오랜 시간 동안 객관과 주관, 사실과 허구,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 걸터앉아 있었던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실제 감독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영화적 수단과 방법(이 영화는 촬영을 위해 16mm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 핸드폰 카메라 등을, 그리고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해 기억, 여행, 인터뷰, 리서치 등을 활용했다)을 최대한 전유하여 외할아버지 장석윤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그린다. 비록 그 어떤 접근으로도 한 역사적 인물의 리얼리티를 총체적으로 복원할 수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만날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제작 과정의 일부로 포용하겠다는 것이 이 영화가 시종일관 고수하는 태도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련의 실패는 이 작품의 이야기가 구축되는 기반이다. 예를 들어,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중국 중경을 방문하는 과정을 담은 장면들이 있다. 중경의 고층빌딩을 비추던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화면 안에 들어온다. 감독과 그의 일행은 그 건물 안에 들어가 외벽에 나열된 이름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곳에 전시된 사진들 사이에서 장석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들은 장석윤과 관련된 그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한다. 카메라가 중국 중경에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흔적의 형태로 잔존해 있는 역사의 파편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증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증언의 능력이 없는 무용한 것들이다. 다만 그 침묵하는 파편들은 감독 본인에게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역사적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영화는 장석윤이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맞닥뜨리는 일련의 좌절을 역사라는 거대한 암호를 풀어나가는 단계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영화는 점진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무언가에 대해 질문하고, 상상하고, 사유하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하나의 정교한 직물처럼 배열한다.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이 영화의 형식과 내용 각각에서 나타나는 혼돈을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간헐적이지만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그의 질문은 사소한 것에서 심오한 것으로 발전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연쇄 속에서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된 질문이 비약적으로 도출된다. 앞서 언급했던 동물원의 예를 다시 들자면, 감독은 동물원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1923년 미국으로 이주한 외할아버지의 정체성,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에 대해 질문한다. 전치된 동물과 전치된 인간은 모두 문턱을 넘나드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서로 간에 친화력을 갖는다. 이처럼 동물원에서 시작된 사소한 질문은 국적, 지역, 인종, 성별을 넘어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미덕은 작은 질문을 더 큰 질문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에세이적인 예술형식의 질문은 하나의 심판과 같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에서의 심판이 아니라 과정이 부단하게 이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심판이다. 그 중단 없는 사유의 힘이 찰나적인 순간에 심판자의 역할을 하면서 이 영화는 숙명처럼 끌어안았던 혼란을 잠식시킬 힘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역사적 대상들을 향했던 그 많은 질문은 먼 길을 돌아 감독 자신에게 돌아온다. 감독은 과거에 기록해 둔 사진과 영상들을 화면 안에 펼쳐 놓으면서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가 어디인지를 되돌아본다. 어느 화면 속에서 감독은 공군을 홍보하는 리포터의 자격으로 공군기지에 있지만, 다른 화면 속에서 감독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시민의 자격으로 촛불 시위 현장에 있다. 이 상반된 상황의 몽타주는 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국가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삶의 모습과 거꾸로 그 국가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감독은 본인의 사적인 역사를 들춰보면서 공적인 역사의 이율배반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감독은 언제부턴가 서울의 광장이 그리고 그곳의 거리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는 장례식장이 되었다면서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제, 쌍용자동차 희생자 기도회,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추모 집회, 세월호 희생자 추모 집회와 관련된 영상을 보여준다. 이 애도의 물결 속에서도 국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화는 국가에 관한 두 개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하나는 감독 외할아버지의 역사 속에서 사회 발생적으로 폭력의 독점적 지위를 지녔던 국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감독의 자전적인 역사 속에서 사회적 책무를 방임한 채 권력의 우산 아래 숨은 국가이다. 이처럼 감독은 외할아버지 생애사와 자신의 자전적 역사를 교차 배열하면서 그 두 개의 개별적인 역사 사이의 간극 안으로 아직 그 실체를 완전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은 국가를 소환한다.
이제 이 영화의 도입부를 명쾌하게 바라볼 준비가 된 것 같다. 동물원의 동물은 은유인 동시에 알레고리이다. 동물원, 동물원의 울타리, 동물은 각각 사회, 경계, 인간을 빗댄 것으로, 영화가 동물원에 빗대어 묘사하고자 했던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실존적 상태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동물원은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도 전진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따라서 이원우 감독의 <옵티그래프>는 어쩌면 몰락을 앞두고 곤두박질치고 있을지도 모를 현실의 모습을 그린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동물원의 동물들을 위한 이 영화의 질문, 그것은 사회라는 거대한 쇠우리에 갇힌 인간들을 위한 질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