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의 밤과 낮: 박수현의 <일>

REVIEW

재개발의 밤과 낮
: 박수현의 <일>(2016)

이도훈 / 『오큘로』 편집동인



도시 재개발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쉬이 떠올릴법한 서사와 양식이 있다. 재개발 지역 공동체 내부의 결속과 유대를 강조하거나, 재개발 지역 주민을 불굴의 투사로 묘사하거나, 재개발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을 가족, 집, 방 등 사적 공간으로 축소하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이는 도시 재개발을 다룬 많은 다큐멘터리들에서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다. 진부함에 대한 검열과 도전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 시도 자체가 희귀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근래 만들어진 도시 재개발 관련 다큐멘터리 중 희귀한 쪽에 속하는, 다시 말해 클리셰를 경계하는 경우로 박수현 감독의 단편 <일>을 꼽고 싶다. 이 영화는 별안간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안 때린 게 어디야...”라는 한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남자는 과거 용역업체에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회상한다. 그의 과거 경험이 진술되는 동안 야간모드로 촬영한 폐가의 모습이 보인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콘크리트 벽 사이로 갈라진 구멍이 있고 그 너머로 폐가의 내부가 보이는 구조다. 이어서 동네 개 짖는 소리가 들린 다음 정체불명의 인기척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차가운 밤공기와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인 그곳에 유령이라도 살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영화는 경험의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실험들을 단계적으로 수행한다. 우선, 남자가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일(work)’은 남자가 과거 용역업체에서 임금 노동을 했던 경험을 가리킨다. 그는 몸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듯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유년시절 그는 또래 친구들처럼 평범한 직업을 꿈꾸었다. 하지만 소박한 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연한 계기로 재개발 지역을 철거하는 일을 하면서 산산이 조각난다. 주민들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그들의 세간살이를 부수거나 나르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남자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인격을 훼손당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는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남자의 말에 휴지기를 부여하거나 그의 말이 중단되는 순간 암전 효과를 줌으로써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었던 것이 윤리임을 암시한다.

남자의 이야기는 카메라와 편집의 힘을 통해 진정성을 획득한다. 남자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동안 화면에는 실제 어느 재개발 지역의 모습이 몽타주 된다. 흥미롭게도, 그 몽타주는 도시 재개발을 다룬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이 강조해왔던 공권력과 지역 주민들, 철거 용역과 지역 주민들 사이의 물리적 충돌과는 사뭇 다르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부서진 건물과 철거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의 모습뿐이다. 재개발 현장의 이미지는 파편화되어 있고 그 조각들은 다시 모자이크식으로 조립된다. 이러한 몽타주 기법은 당대의 대도시 풍경을 유토피아적 비전 속에 담아내려 했던 1920년대 도시 교향곡(city symphony)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일>은 도시 교향곡의 전통을 계승하고 변주한 ‘재개발의 교향곡’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감독은 도둑 촬영하듯 용역업체 직원들의 작업 과정을 먼 거리에서 줌인해서 찍었다. 화면은 뭉개져 있고, 불투명하며, 전체적으로 흔들림이 많다. 철거 현장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위치와 시선은 멀리서 바라보기와 숨어서 바라보기로 요약 가능하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철거현장을 찍고자 하는 연출적인 충동과 (남성적인 동시에 불법적인) 철거 현장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방어적인 본능이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줌렌즈를 활용한 것은 멀리 있는 현장과 대상을 가까이 끌어당겨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 영화의 멀리서 바라보기와 숨어서 바라보기는 연출자와 철거 현장 사이의 심리적, 정신적 거리를 극복하고 궁극에는 철거 현장의 비가시성을 가시화하기 위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도시 재개발을 구조화하는 메커니즘의 중심에 노동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노동의 범위는 국지적으로는 용역업체 직원들의 철거 작업을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도시의 파괴와 재생에 동원되는 사회적 실천을 포함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용역업체 직원들은 생기 없이 기계적으로 물건을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도시 재개발을 기회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려는 자본에 고용되어 도시를 파괴하는 일을 대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재개발 현장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신체를 축적 기계로 활용해 도시의 파괴를 도시의 생산과 맞교환 한다. 또한 자본은 노동자를 방패막이 삼아 자신에게 돌아올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회피한다. 도시 재개발 현장은 도시라는 괴물이 제 몸집을 무한정 불려 나가기 위해 체계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장소인 셈이다. 

도시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날 즈음 영화는 즉각 행동에 나선다. 그 행동이라는 것은 재개발의 파괴의 논리 혹은 축적의 논리에 맞서기 위한 전술적 대응이다. 감독은 야심한 밤에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어느 재개발 지역의 골목을 전전한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곳에는 버려진 가구와 쓰레기로 가득하다. 카메라는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폐가의 벽면을 비추거나 쓰임새를 잃고 버려진 사물들의 무질서한 상태를 비춘다. 여기까지는 재개발이 할퀴고 간 흔적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이어서 카메라 앞에 한 여성이 등장한다. 오프닝에서 감지되었던 인기척의 주인이자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으로 추정되는 한 여인이 폐가의 한쪽 벽에 기대앉은 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모포를 덮는다. 폐가를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이와 같은 퍼포먼스는 다분히 재개발이라는 죽음의 시공간을 삶의 시공간으로 바꾸려는 연출가의 자기 반영적인 행위로 보인다. 또한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카메라는 그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을 점유하고 그 공간 속에서 시간의 지속을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한다. 여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천장을 바라본다. 숏이 바뀌면 화면에는 흉흉한 폐가의 몰골이 드러난다. 이 순간 카메라의 시선은 여성의 시선과 동기화됨으로써 그녀는 영화 속 모든 시지각적 경험의 주체가 된다. 그렇게 연출자인 동시에 퍼포머인 한 여인의 개입, 침투, 관찰을 통해 어느 도시 재개발 지역은 교란되는 동시에 지각 가능한 형태로 변환된다. 

이 모든 실험 과정은 가혹하다. 용역업체에서 일했던 남자가 트라우마에 시달렸듯이, 재개발 지역에 침투해 그곳의 공포와 불안을 몸으로 경험했던 연출자 자신도 정신적인 외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혹한 실험의 가치는 부서지고, 사라지고, 망각되는 공간을 온몸으로 기억하기 위한 과정에 있다. 낙인이 신체에 영구적으로 남는 것을 예로 들면서 “고통이 기억술의 가장 강력한 보조 수단”이라고 썼던 니체의 말을 상기해보자면, 박수현 감독의 <일>은 도시 재개발의 고통을 언어와 신체를 거쳐 영상 이미지에 각인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최후를 앞둔 삶의 터전을, 누군가는 최후 이전의 모습으로 기억해야 한다고.